이른 아침 미용실에 다녀왔다. 오래간만에 외출에 큰맘 먹고 머리 하러 나섰더니 비가 내린다. 하늘 컨디션이랑 나랑 안 맞다. 미용실 정착이 어려워 매번 새 곳을 찾아 헤매다 라라미용실은 벌써 6번째 재방문이다.
30대 중반 추정, 깔끔한 외모에 웜톤 피부, 여행 다니는 걸 좋아하고 맛집에 빠삭하며 낚시를 좋아하는 비혼주의자. 라라미용실 원장님이다. 6번의 방문을 통해 알게 된 그의 정보다. 그는 두피 마사지를 끝내주게 잘한다. 샴푸 후 실시하는 1분 남짓 마사지 때문에 여길 포기할 수 없다. 게다가 부담스럽지 않은 적당한 대화도 마음에 든다. 미용실에서 머리를 만져주면 항상 잠이 오는 나는 무리한 만담을 시도하는 미용실은 재방문하지 않았다. 미용실에서 꾸벅꾸벅 잠깐 조는 그 시간이 몹시 행복하다. 스르르 잠이 오는 순간 아무런 저항 없이 졸 수 있다는 게. 그래서 나는 조용한 미용실을 좋아한다.
미용실에 도착해 가운을 입고 의자에 앉았다. 머리카락 상태를 살피더니 난감한 표정으로 웃어 보이는 원장님. 작년에 히피펌을 하고 싶다는 내게 "지금 상태로 히피펌을 하면 머리카락이 전부 다 뚝뚝 끊어져버릴 거예요" 라며 경고를 했었는데.. 나는 원장님의 낯을 피해 히피펌 전문 미용실을 찾아 펌을 하고야 말았다. 그 결과 내 머리카락은 타다 못해 쩍쩍 갈라지고 엉키고 손가락 빗질조차 어려운 지경에 이르렀다.
큰돈 주고 한 게 아까워 1년은 유지하려 했는데 머리카락 상태를 보니 당장 잘라야 할 것 같다. 이왕 타버린 머리, 자르기 전 펌 한번 더 하고 싹둑 자르면 어떨까 물으니 절대 안 된다며 말린다. 아마 지금 머리에선 펌이 제대로 안 나올 거라 잘라내는 거 말곤 방법이 없다고. 그래도 오늘은 마음의 준비가 안 됐다며 조금만 자르고 어두운 색으로 염색을 하겠다고 했다. 나의 머리카락 주치의는 씁쓸한 미소를 지으며 단 5cm만 샤샥 잘랐다. 말 안 듣고 또 딴 데 가서 펌이라도 하고 올까 봐 의심하는 눈치였다.
앞머리를 기를까 자를까 꽤 심각한 고민을 하다 풀뱅을 하기로 결심했다. 풀뱅 사진을 캡처해 보여주니 옆머리가 부족해 풀뱅은 힘들다고 한다. 울며 겨자 먹기로 숱이라도 더 내달라 했더니 반뱅을 만들어주셨다. 어딘가 어수룩해 보이지만 괜찮다. 소주 반뱅이면 예뻐 보일 거다.
유일하게 우리 둘의 의견이 일치한 건 염색 색깔이었다. 잦은 염색으로 얼룩덜룩해진 머리를 진 갈색으로 차분히 덮는 게 어떠냐는 제안이 맘에 들었다. 어두운 색이지만 빛에 반사될 때 예쁜 카키색이 나게 해 주겠다는 말에 물개 박수를 쳤다.
이제부터 내가 좋아하는 고요의 시간이다. 염색약을 바르고 흡수될 때까지 기다리며 눈을 끔뻑끔뻑한다. 나른한 쉼이 참 좋다. 적당히 시간이 흐르고 샴푸를 하며 최고의 1분인 두피마사지를 끝내면 다시 자리로 돌아와 머리를 말린다. 머리를 말릴 땐 눈을 감아야 한다. 머리카락이 사방으로 휘날리며 눈을 때리니까. 숭숭 나오는 따뜻한 바람에 또 잠이 온다. 눈을 감고 뜨니 차분한 갈색 인간이 거울 앞에 있다. 상한 머리를 자른 덕에 꽤 단정해 보이는 모습이 맘에 든다.
거울을 가만히 들여다보며 상한 머릴 자르듯
잘라내고 싶은 것들에 대해 생각한다.
억지로 고집부려 잡고 있는 기억들,
자려고 누우면 생각나는 후회들.
싹둑싹둑 잘라내고 나면 내 삶도 좀 근사해지려나.
아무렴 너는 추억이란 이름으로 자르고 잘라내도 다시 돌아올 테지만
끊임없이 내면의 미용사와 대화를 나눈다.
"얼마나 자를까요?"
"이번엔 많이, 아주 많이 잘라주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