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 유년의 우물

by 변은경


동시마중 2025년 93호




엄마, 별이 내려왔나 봐

18층 아파트 베란다에서 네 살 된 아이를 업고 잠을 재우던 밤을 잊지 못한다. 육아에 지친 시간을 위로해 준 밤이기도 했고 잃어버린 문장을 예상치 못한 곳에서 다시 찾은 느낌이 들었달까. 등에 엎드려 있던 아이가 “엄마, 별이 내려왔나 봐”라고 불이 켜진 산 아래 동네를 가리켰다. 그날 이후 아이에게 바람과 나무의 말을 배웠다. 아이 입에서 나오는 말을 받아 적다가 자연스럽게 동시를 쓰게 되었다. 그 날밤은 선물이었고 동시를 계속 쓸 수 있게 하는 우물이 되었다



또 하나의 우물

우물은 어릴 적부터 있었는지도 모른다. 우리 집은 가난했다. 몸이 약한 아버지는 농사에는 관심이 전혀 없으셨고 아랫목에 누워 계시는 시간이 많았다. 하지만 난 아버지가 좋았다. 밤이면 손가락으로 그림자를 만들어 놀아주셨고 농사일을 거들 때도 언제나 놀이가 동반되었다. 사전이 없던 시절 모르는 낱말의 뜻도 척척 알려 주셨다. 유독 빼빼 마른 내가 비바람이 날아갈까 봐 파란 챙이 달린 노란 우비를 사 주셨다. 우비에 떨어지는 빗방울 소리를 지금도 잊지 못한다. 아버지의 살핌은 결핍의 그늘을 밀어내기에 충분했다. 아버지는 동네 이장이 되자마자 마을도서관을 만드셨다. 기증된 책들은 마을회관 한쪽에 가득 찼다. 어른들만 있던 회관에 책을 빌리러 아이들도 드나들었다. 대출 기간이 넘으면 으레 아버지는 안내 방송을 했고 온 동네에 반납하지 않은 아이들의 이름이 울려 퍼졌다. 아마도 아버지는 신나지 않았을까 싶다. 그 목소리는 오랫동안 동네 아이들을 키웠고 나에게는 책을 좋아하고 글을 쓰게 하는 깊은 우물이 되었다.


어릴 적 내 방문의 창은 바깥쪽으로 밀어 들어 올리는 들창이었다. 난 바깥으로 밀기만 하면 양쪽 창이 다 열어지는 창문을 갖고 싶었다. 지금 생각하면 무리한 부탁이었는데도 아버지는 어린 내가 창문을 쉽게 열 수 있게 만들어 주셨다. 낑낑대며 창문을 열 때와 가볍게 활짝 여는 느낌은 전혀 달랐다. 창호지를 바른 창문이었지만 지금까지도 난 그 창문이 가장 좋다. 다섯 자식 중에 섬세한 정서를 갖고 계신 아버지를 가장 많이 닮았다. 아무래도 아버지를 닮아 지금 시를 쓰고 있는지도 모른다. 아버지가 만들어 준 우물에 두레박을 자주 내린다. 두레박에는 갈증이 단박에 해소되는 동시가 올라오기도 하지만 아무것도 없을 때가 더 많다. 그래도 괜찮다. 두레박을 내릴 우물이 내겐 항상 있으니까.



시작

우물은 있지만 두레박을 올리는 힘이 내겐 많이도 부족했다. <어린이와 문학>에 추천이 완료되기까지 꽤 오랜 시간이 걸렸다. 1회 추천은 놀랍게도 두 번 만에 되었다. 동시를 쓰면서 기쁜 순간이 여럿 있었지만 1회 추천 완료 소식은 뜨거운 눈물을 흘리게 했다. 운전 중이었는데 눈물이 나와 난감했다. 추천된 작품은 <해바라기>였는데 32킬로그램의 야윈 아버지의 모습을 그린 시였기 때문이다. 오래 아프셨다. 이제는 하늘나라에서 내 동시의 소식을 듣고 계신다. 두 번째 추천은 엄청나게 오래 걸렸다. 열 번도 넘게 투고했던 것 같다. 재능을 의심했고 계속 쓰는 건 의미 없어 보였다. 돌아보면 그 시간이 있었기에 지금 이 글을 쓰고 있는지도 모른다. 더 많은 동시를 읽고 필사를 하고 작은 존재들에 대한 깊은 사랑이 싹트는 시기이기도 했다. 그래서였을까 마지막 추천은 한 번 만에 되었다. 하지만 등단은 또 다른 시작이었다. 등단만 하면 되는 게 아니었다. 등단 너머의 세계는 더 아득했다. 쓰고 또 쓰는 길밖에는 없었다.



보이지 않지만

가네코 미시즈의 시를 좋아한다. 맑은 샘물을 마시는 것 같기도 하고 어린 날의 쓸쓸한 시간을 떠오르게도 한다. 달빛이 환한 밤이면 어린 나는 청승맞게 대문 밖에서 달을 보고 앉아 있곤 했다. 그런 날이면 아버지는 아무 말 없이 지켜보다가 기침 한 번 하시고 들어가셨다. 무슨 말씀을 하고 싶으셨을까. 궁금해도 물어볼 수 없는 아버지가 그립다.


푸른 하늘 속 깊이

바다의 조약돌처럼,

밤이 올 때까지 잠겨 있는,

낮별은 눈에 안 보여.

보이지 않지만 있어요,

보이지 않는 것도 있어요.


꽃 지고 시든 민들레의,

기왓장 틈새에 묵묵히

봄이 올 때까지 숨어 있는,

강한 그 뿌리는 눈에 안 보여.

보이진 않지만 있어요,

보이지 않는 것도 있어요.


가네코 미스즈, <별과 민들레> 전문

(《나와 작은 새와 방울과》, 소화 2014)


낮별과 뿌리는 보이지 않는다. 보이지 않지만 안달하지 않는 건 믿음 때문이다. 밤에 꼭 빛난다는, 시간이 되면 꽃이 핀다는 믿음. 하지만 등단 후 첫 책이 나오기까지 그 믿음에 균열이 갈 때가 많았다. 애를 쓴 시간에 지쳐 정작 꽃만 보고 향기는 못 맡았던 것도 같다. 지금도 의심하는 시간이 있기는 하지만 그전처럼 불안하지는 않다. 그저 씀의 시간을 즐기게 되었기 때문이다. 시가 찾아오지 않아도 눈과 귀와 마음에 동시 센서를 가동하고 있으면 어느 날 불쑥 거짓말처럼 시가 문을 두드린다. 기쁘다. 시가 왔는데 몰라보지 않아서다. 하얗고 가벼운 둥근 씨앗의 비행 안엔 노란 꽃에 대한 믿음이 있다는 걸 알게 되었다. 보이지 않는 것들에 대한 믿음은 동시를 계속 쓰게 하는 우물이 되어 주었다.



쪼그려 앉는 시간

동시가 만들어 가는 아름다움의 둘레는 환하고 신나고 신비롭고 때론 슬프다. 이런 동시를 내가 쓰고 있다니 놀라우면서도 어린이의 마음으로 세계를 보는 행위가 진실된 것인지 자문할 때가 많다. 벌레 소리나 달빛의 말을 제대로 듣고 있는지, 흉내만 내고 있는지 고개가 갸웃할 때가 있지만 내 유년의 우물은 아직 마르지 않았기에 어린 나에 기대어 쓴다. 설령 사라져 버린 것 같아도 불러주면 언제라도 벌떡 일어나는 게 유년의 시간이다. 풍선처럼 부푼 시간을 손에 쥐여주면서 소꿉놀이를 했던 담장 밑으로 데려다줄 것을 믿는다. 이안 시인의 시처럼 채송화 앞에 쪼그리고 앉아 발바닥에 오르는 전기를 기다리면 되는 것이다. 시가 되는 대상의 마음을 아는 건 아직도 어렵다. 앞으로도 어려울 것이다. 내가 대상이 되어 진실로 사랑하는 길밖에 없는 듯하다. 마음과 귀와 눈을 열어 대상을 진심으로 환대해야 비로소 그 세계가 내가 되어 시가 생명력을 갖게 될 터이기 때문이다.


조용한 시간을 좋아한다. 아이들을 만나서 책을 읽고 글쓰기 하는 시간을 제외하고는 혼자 있는 시간이 대부분이다. 조용한 시간은 멈춤으로, 멈춤은 고요로, 고요는 골똘한 세계로 인도해 시를 내놓는다. 마음 안에 있던 말들이 시가 되어 세상 밖으로 나가는 일이 지금도 신기하기만 하다. 지면을 통해 보는 나의 시는 조금 생소하다. 시를 썼던 나는 과거에 있고 시와 오롯이 마주한 기쁨이 현재에는 조금밖에 남아있지 않아서일까. 슬쩍 보고 덮어두었다가 한참 시간이 흐른 후에 보는 습관이 있다. 나의 시가 미래의 시간을 계속 살아가기를 바라는 마음으로 찬찬히 읽는다.


늦은 오후와 쪼그려 앉아 들풀 보는 것도 좋아한다. 동시와 가장 가까이 있는 시간이다. 빛이 비스듬히 몸을 낮춘 오후에 동네를 어슬렁어슬렁 다니며 사진을 찍는다. 사진 속의 자연은 선명할 때가 더 많다. 쪼그려 앉아 눈으로 보고 렌즈로도 자세히 본다. 이런 시간이 내게는 동시를 여는 열쇠이다. 딸깍 열리는 동시의 세계에선 온전한 내가 되어 자유롭다.



힘든 날 아빠는


할아버지 숟가락으로 밥을 잡수시고


천천히 잘 닦아 찬장에 올려놓는다


이지우 <숟가락 기도> 전문

(《동시마중레터링 서비스 블랙》, #133)


얼마 전 이지우 시인의 <숟가락 기도>를 읽고 먹먹해서 눈물이 났다. 한참이나 아버지의 시간을 더듬었다. 난 아버지 숟가락이 없어서 어쩌나 조금 허둥대다가 수많은 숟가락이 떠올라 슬며시 웃음이 났다. 아버지의 섬세한 손길로 인해 내 단발머리는 언제나 단정했고 달력으로 말끔하게 싼 교과서를 가질 수 있었다. 동시가 안 써지는 날에는 나도 아버지를 떠올리겠다. 아버지의 뜰 안에서 어린 내가 놀고 있고 아버지는 그런 나를 보고 웃으실 거다. 아버지의 시간과 어린 나와 흰머리가 늘어가는 내가 동시를 같이 쓰면서 살고 있다. 혼자가 아니어서 기쁘다. 내 유년의 우물이 마르지 않기를 바란다. 이제는 더 깊이 우물을 팔 차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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