용문 뚝방길에 두고 온 우리의 사계절

부부 교환일기 by 다슈니

by 다슈니와 호돌이

#26년 2월 22일

일요일



김쥬둥 씨의 일기를 읽다 보니, 동갑내기 사촌 부부와 함께했던 나들이가 파노라마처럼 스쳐 지나갑니다. 우리의 아지트는 단연 용문 외할머니댁이었죠.

이젠 빈집이 된 외할머니의 보금자리를 가장 부지런히 드나든 건 사촌부부와 우리들이었습니다. 오래전 외할아버지가 지으시고 아버님이 수리한 집. 크진 않지만, 그야말로 가족 연대기가 담긴 공간이었죠. 평생 전기를 만져오신 아버님의 정성 어린 리모델링 덕분에, 옛집의 정취와 현대적인 깔끔함이 묘하게 공존하던 곳이었습니다. 집 안 곳곳에 저마다의 사연이 깃들어 있어서일까요? 대문을 열고 들어서면 바깥세상과는 조금 다른 속도로 시간이 흐르는 것만 같았습니다.

한창 재미 들었을 땐 거의 두 달에 한 번은 용문에 갔던 것 같아요.

봄이면 벚꽃이 흩날리는 용문 뚝방길을 하염없이 걷고, 여름에는 더 맑고 깊은 물을 찾아 개울가를 헤맸죠. 가을이면 용문사의 천년 은행나무 아래서 샛노란 가을을 온몸으로 만끽하고, 겨울에는 추워서 몸을 잔뜩 웅크리면서도 전기요를 챙겨 나가 평상 위에 자리를 잡았죠. 버너 위에서 보글보글 끓던 어묵탕의 냄새와 코끝을 스치는 알싸한 새벽 공기가 지금도 선명합니다. 네 사람의 웃음소리가 골목 끝까지 퍼져 나갔을 텐데, 용문의 밤은 그 철없는 소란마저 너그럽게 품어줬습니다.

이제는 그 집을 사용할 수 없지만, 용문을 떠올리면 차가운 공기보다 먼저 따스함이 떠오릅니다. 외할머니댁에서 옹기종기 수다를 떨던 기억 덕분이겠죠. 사촌과 이렇게 친구처럼 지낼 수 있다는 걸, 당신 덕분에 알았습니다.


사실 전 이 모임의 유일한 아침형 인간이었죠. 다들 숙취에 잠든 사이, 홀로 라면을 끓여 먹으며 평화로운 아침을 독점하곤 했어요. 시간이 흐를수록 저만의 행동반경도 넓어졌습니다. 팟캐스트를 동무 삼아 뚝방길을 걷거나, 근처 카페에서 책을 읽고 뜨개질도 했어요. 운전을 시작한 뒤엔 시내 외곽의 힙한 카페까지 섭렵하는 나 홀로 용문 투어를 즐겼습니다. 고요한 아침, 혼자만 아는 풍경을 하나씩 모아가는 기분이 꽤 근사했습니다.

외할머니에 대한 제 기억은 단편적입니다. 세배를 드리면 괜찮다고 손사래 쳐도 기어코 손에 쥐여주시던 빳빳한 세뱃돈만큼은 또렷하게 기억해요. 그건 돈이 아니라 할머니의 마음을 꾹꾹 눌러 담은 따뜻한 손길이었다는 걸, 이제야 조금 알 것 같아요. 가을이면 담 너머의 밤나무 가지에서 쏟아지던 밤송이의 풍요로움처럼요.


용문에서의 기억이 이토록 눈부셔서일까요? 언젠가 그곳에서 살고 싶다는 꿈을 꿉니다. 서울과 적당히 가깝고, 전철과 기차가 다니는 곳. 작은 텃밭을 가꾸고 문화센터에서 운동하며, 뚝방길을 산책하는 아기자기한 삶. 가끔은 창밖의 밤나무를 보며 젊은 날 우리들의 소란스러웠던 밤을 추억하기도 하겠죠. 그때가 되면 이 일기를 다시 꺼내 읽으며, 참 먼 길을 돌아왔구나 하고 기분 좋게 웃고 싶습니다.

그날이 언제 올지는 모르겠지만, 이 글을 쓰는 지금 이 순간에도 용문의 공기가 코끝에 맴도는 것 같아요.

김쥬둥 씨! 우리 그때도 지금처럼— 친구처럼, 연인처럼 재미있게 살아봐요!


하지만 어디에 가든 ‘여기 너무 좋아, 살고 싶다’고 말하는 다슈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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