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억의 빈칸을 채워주는 사람

by 다슈니

by 다슈니와 호돌이

저는 기록을 좋아합니다. 그 시작을 떠올려보면, 초등학교 시절 방학 숙제로 내주어지던 일기 쓰기였던 것 같아요. 저 역시 밀린 일기를 몰아서 쓰는 아이였는데, 나름의 요령은 있었습니다. 먼저 빈 공책에 날짜를 쭉 적어두고, 각 날짜에 어떤 이야기를 쓸지 계획부터 세웠지요. 그리고 며칠에 한 번은 일기를 시로 대신했습니다. 시로 쓰면 몇 줄만 적어도 되니까요.

물론 지금 생각해 보면 그걸 과연 시라고 부를 수 있을지는 모르겠습니다. 어느 날 동생과 싸웠다면 일기의 주제는 자연스럽게 동생이 되었고, 동생을 킹받게 하겠다는 일념으로 까무잡잡한 피부색을 빗대어 <내 동생은 짜장면>이라는 제목의 시를 써서 낭독하기도 했습니다. 지금 와서 보면 참 철딱서니 없는 기록이지요. (이 자리를 빌려 자매님께 다시금 진심 어린 사과를 남깁니다.)

그때 일기를 쓰면서 기록이라는 행위 자체를 좋아하게 된 것 같습니다. 다만 지금의 일기는 조금 다릅니다. 여전히 일기를 쓰고는 있지만, 대부분 다시 읽어보지 않거든요. 제 일기는 기록이라기보다는 감정 쓰레기통에 더 가깝습니다. 그날의 분노와 불안, 좌절을 와다다다 쏟아내듯 적어두고 마음을 조금 가볍게 만드는 방식이죠.

예전에 동생의 일기를 자주 훔쳐봤던 탓에, 미안하게도 동생은 그 이후로 일기를 쓰지 않게 되었다고 하더군요. 그런 점에서 보면 제 기록을 매너 있게 존중해 준 과거에는 동생, 현재에는 호돌이가 있기에 덕분에 저는 지금도 부끄러운 마음을 숨기지 않은 채 일기를 계속 쓰고 있는 셈입니다.

그런데 가끔은 이런 생각도 듭니다. 다시 펼쳐보지 않는 기록을 과연 기록이라 불러도 될까, 하고요. 그래서인지 책에 관한 기록만큼은 다른 방식을 택하고 있습니다. 감상문 대신 마음에 남은 문장을 필사하는 방식으로요. 필사는 제 글이 아니기에 다시 읽을 수 있고, 그 문장들은 시간이 지나도 저를 부끄럽게 하지 않습니다. 마음이 흔들리거나 기분이 가라앉을 때 필사 노트를 펼치는데요, 문장들이 저를 단단히 붙잡아 주는 느낌이 들어 힘이 됩니다.

저는 일기 쓰는 것만큼이나, 행복했던 시간을 되돌아보는 걸 좋아합니다. 휴대폰 갤러리에 뜨는 그날의 사진, 최고의 순간 같은 알림을 거의 거르지 않고 다시 보는 편이에요. 사진을 들여다보는 것만으로도 금세 행복해질 수 있으니까요.

우리는 기억하는 방식이 참 다릅니다. 저는 장소나 명칭, 숫자처럼 팩트에 가까운 것을 비교적 잘 기억하는 편이고, 호돌이는 특정 순간을 아주 밀도 있게 기억합니다. 마치 16mm 필름으로 찍어 둔 장면처럼, 그날의 조명, 온도, 습도까지 함께 남겨두는 방식으로요. 그래서 같은 하루를 지나왔어도, 우리가 기억하는 장면은 종종 다르곤 합니다. 그런데 이상하게도 그 차이가 싫지 않습니다. 오히려 좋습니다. 기억이 두 배가 되는 기분이 들어요.

저는 호돌이의 유행어, '그, 저기, 뭐냐, 있잖아요, 그, 뭐였지?'도 참 좋아합니다. 알다시피 저는 퀴즈 맞히기 마니아니까요. 우리는 이렇게 서로의 빈칸을 채워주며 기억을 완성해 가는 사이인지도 모르겠습니다.

생각해 보면, 이 교환일기 자체가 우리가 함께 만드는 기억의 한 형태일지도 모르겠네요. 완벽하진 않아도, 우리에게 남아 사라지지는 않을 방식으로요.


기록과 퀴즈 맞추기를 좋아하는 다슈니

월, 목 연재
이전 03화기록하고 생각하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