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 목소리는 이렇지 않아!

by 호돌이

by 다슈니와 호돌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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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야 할 일을 미루다가 이제야 글을 쓰고 있습니다. 나 자신과의 약속을 어겼음에도 전혀 개의치 않는 호돌이. 어른이 된다는 건 이렇게 뻔뻔해져 간다는 것과 같은 뜻이겠지요(아님). 시답잖은 농담이긴 했는데 안 좋은 의미로, 늙어간다는 건 분명 뻔뻔해지고 수치심이 없어진다는 것일지도 모르겠습니다. 외모는 어쩔 수 없어도 마음만은 그러지 말아야겠다고 다짐해 봅니다. 수치심은 때로 우릴 좋은 의미로 바뀌게 하고 성장시키기도 하니까요. 일기를 하루 빼먹었다고 혀가 이렇게 길어지는 걸 보면 아직 수치심이 남아있는 것 같기도 해서 재차 뿌듯해집니다. 일을 빼먹어도 뿌듯해하는 사람. 뿌듯쟁이가 여기 있습니다. 보고 계시나요? 박정민 배우님, 작가님.

다슈니는 처음 자신의 목소리를 들어본 걸 기억하시나요? 내가 말하면서 듣는 목소리가 아니라 정말로 다른 사람이 말하는 것처럼 들어본 기억.

중학교 때였던 걸로 기억합니다. 아마도 1학년 또는 2학년. 영어선생님이 내주신 숙제였습니다. 교과서 한 단원의 꼭지를 직접 읽어서 녹음하고 제출해야 했었죠. 마침 우리 집에 녹음이 가능한 카세트테이프 플레이어가 있었습니다. 동네에 살던 친구와 함께 숙제를 하려고 집에서 녹음을 시작했지요. 그 친구가 먼저 녹음을 하고 재생을 했는데 발음도 그렇고 녹음된 목소리도 거칠어서 웃음이 터져 나왔습니다. 친구는 얼굴을 붉히며 웃지 말라고 언성을 높였습니다. 하지만 저는 웃음을 참을 수 없었습니다. 그렇게 자지러지게 웃지 말았어야 하는데. 그 다음이 제 차례라는 걸 알고 있었다면 말이죠.

웃음을 참을 수 없는 병에 걸린 것 마냥 바닥을 구르며 웃고 난 뒤, 저는 자신만만하게 녹음을 시작했습니다. 문제는 뇌내에서 잘 읽혔던 영어지문을 혀가 재현하지 못했다는 것입니다. 게다가 옆에는 입꼬리에 비웃음을 일발 장전한 친구가 있었지요. 원어민이 와서 읽어도 반드시 비웃고야 말겠다는 강렬한 의지가 느껴졌어요. 덕분에 낯선 외국어를 주절거리는 제 입술은 점점 더 굳어갔습니다(라고 변명해 봅니다). 상상 속에서는 멋들어지게 술술 읽었는데 실제로는 전혀 아니었습니다. 혀는 뻣뻣해지고 목구멍이 조여오는 듯했습니다. 친구가 거대한 분노로 본연의 초능력을 개화시켜 손도 대지 않고 제 목을 조르는 게 분명했습니다.

영원처럼 느껴지던 제 영어 단락 스피킹 시간이 끝나고 더 무시무시한 일이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테이프를 되감고 재생시키자 처음 듣는 목소리가 튀어나왔습니다. 누가 변조한 것 같은 요상한 목소리. 더듬거리는 영어발음이 문제가 아니었습니다.

이게 내 목소리라고? 나는 평생 이런 목소리로 떠들고 다녔단 말인가? 실컷 웃고 개운한 표정을 짓는 친구에게 묻자 여상한 표정으로 답했습니다.

“네 목소리 맞는데?”

제 생각보다 더 경박하고 얇고 톤이 높은 목소리였습니다. 저는 제 목소리가 좀 더 중후하고 멋들어지고 단단하다고 생각했는데 말이죠. 변성기가 늦게 온 터라, 아마 당시에는 변성기도 채 오지 않은 목소리였을 겁니다. 어찌나 충격을 받았는지 그 이후로는 한동안 목소리를 크게 내지 못했습니다. 제 목소리가 창피했달까요. 자신감 없이 기어들어가는 목소리 때문에 더 얄팍한 소리가 나오는, 그야말로 악순환이었습니다. 성대도 근육이고 건강하고 좋은 발성으로 써야 한다는 걸 알았다면 조금은 달라졌으려나요. 라는 if 미래를 떠올려봅니다. 아주 잠깐이지만, 성우, 배우가 되고 싶다는 생각을 해보기도 했었으니까요.


수미상관의 뻔뻔함 호돌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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