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y 다슈니
어른이 된다는 건 정말 뻔뻔해져 가는 일일까요? 호돌이의 일기를 읽으며 가만히 생각해 보니, 저는 오히려 어릴 때가 더 뻔뻔했던 것 같습니다. ADHD의 기운이 어린 시절 저의 뻔뻔함에 한몫했을 거라는 생각이 듭니다. 수치심이 우릴 성장시킨다는 호돌이의 말에 고개를 끄덕이면서도, 동시에 그 수치심에 눌려 한동안 움츠러들었던 기억들이 소환됩니다.
처음 자신의 목소리를 들어본 순간. 호돌이가 묘사한 그 장면이 제게도 생생합니다. 초등학교 4학년쯤이었을까요. 집 전화기의 녹음 기능으로 제 목소리를 듣게 됐는데, 그 목소리가 너무 낯설고 이상해서 한참을 멍하니 스피커를 응시했던 기억이 있어요. 이게 진짜 내 목소리라는 걸 믿기 어려웠던 저는 그 뒤로 녹음된 목소리와 실제 목소리는 차이가 있는 다른 존재라고 철석같이 믿으며 자랐습니다.
제 목소리의 특징은 고음, 비음, 큰 성량으로 다소 아이 같은 느낌이 있지요. 가만히 있어도 작은 체구로 눈에 띄는 편인데 목소리마저 도움을 주지 않았어요. 그렇기에 학교에서 선생님들의 레이더망에 가장 먼저 잡히는 건 늘 저였답니다. 아무리 작게 수다를 떨어도 고음은 멀리 울려 퍼지는 법이니까요. 아니, 작게 만드셨으면 목소리라도 조용하게 해주셨어야 하는 거 아닌가 하며 하늘을 원망하기도 했습니다. 물론, 안 떠들었으면 될 일이지만요. 허허.
언젠가 키 큰 지인과 목소리의 원리에 대해 말하다 나온 흥미로운 가설이 있습니다. 사람과 대화할 때 아래를 내려다보면 저음, 위를 올려다보면 고음이 된다는 것. 키 큰 사람은 자연스레 아래를 보니 저음이 되고, 저처럼 작은 사람은 늘 위를 보며 말하니 고음이 될 수밖에 없다는 논리였죠. 둘이서 웃으며 만든 이론이지만 기묘하게 설득력이 있지 않나요?
공연기획사에서 홍보 일을 하던 시절, 프레스콜 초대를 위해 기자 분들께 전화를 돌리던 날도 떠오릅니다. 한 일간지 기자분께서 목소리와 말투 어미가 거슬린다고, 듣기 불편하다고 하시더군요. 상냥해 보이고 싶어 올렸던 말꼬리마저 오히려 역효과였던 겁니다. 그날 이후 저는 제 목소리가 더더욱 싫어졌습니다. 업무로 인해 통화 녹음을 다시 들어야 했던 시절이 있었는데, 그건 정말 고역이었습니다. 듣기 싫은데 들어야만 하는 상황. 도망칠 곳 없이 시시포스의 형벌을 받는 것 같았습니다. 다행히 요즘은 AI가 통화 내용을 텍스트로 옮겨주고 요약까지 해주니, 제 목소리와 억지로 마주할 일은 줄어들었습니다. 기술 발전 만만세!
언젠가는 목소리 교정 수업을 들어보고 싶습니다. 발성과 호흡, 말투까지 좀 더 안정적으로 다듬어지면 좋겠어요. 성대도 근육이니 잘 쓰면 더 나아질 수 있다고 하더라고요. 왜 이렇게 배워야 할 것도, 고쳐야 할 것도 많은 걸까요? 어른이 된다는 건 평생 업데이트 버전의 나를 만드는 일인지도 모르겠습니다.
그래도 호돌이의 일기를 읽으며 묘하게 위로를 얻었습니다. 나만 목소리 때문에 충격받고 불안해한 게 아니었구나. 우리 둘은 자기 목소리를 받아들이고 친해져 가는 과정의 동료라는 생각이 듭니다. 아니, 어쩌면 대체로 많은 이들이 이 낯선 조우를 겪었을지도 모르죠. 수치심이 우릴 성장시킨다는 말처럼, 이 목소리와의 불편한 동거도 언젠가는 저를 조금 더 단단한 사람으로 만들어주겠죠.
언젠가 제 목소리와의 조우가 편안해지는 날이 오기를.
수치심과 뻔뻔함 사이를 아슬아슬하게 걷는 다슈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