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영을 배운다고 친구들에게 얘기했을 때, 한 녀석이 말했다. “수영은 정말 상쾌한 운동이지. 운동을 했는데도 땀이 안 나잖아.” 이 말을 들은 수영 20년 차의 다른 친구가 말했다.
땀은 나지 멍청아. 단지 물에 씻겨 내려갈 뿐.
모순이지만 두 친구 모두 맞는 것 같다. 수영을 하는 동안에는 땀으로 젖을 일이 없고, 축축해진 옷이 몸에 들러붙어 찝찝할 일도 없다. 적당한 운동은 그 종류에 상관없이 상쾌한 기분을 선사하겠지만, 수영은 운동 과정 자체에서도 청량함을 안겨준다. 물론 다른 운동에서는 경험할 수 없는 고통도 있다. 코로 들어간 물의 따가움이라든지 한 번 귀로 들어가면 도저히 빠질 생각이 없이 눌러앉는 물이라든지. 귀에 들어간 물을 빼기 위해서는 악전고투를 거듭해야 하지만, 그래도 여전히 상쾌한 운동임에는 변함이 없다.
반대로 수영을 경험해본 사람이라면 후자의 말에 더욱 공감할지도 모르겠다. 아무리 물속에서 하는 상쾌한 운동이라지만, 운동은 운동인 법이다. 나도 그랬지만 몇몇 사람들은 수영이 매우 격렬한 운동이라는 걸 망각하는 경우가 있다. 하루만 강습을 받아보면 머리보다 몸이 먼저 그 사실을 깨달을 것이다. 심지어 수영장을 가득 채운 물이 내가 흘린 땀을 씻어준다는 사실이 고맙게 느껴질 때가 있다. 그렇지 않으면 땀에 쩐 상기된 얼굴로 거친 숨을 몰아쉬는 나의 몰골을 상상해야 할 테니까. 조금 비위 상하는 말일 수도 있지만 수영장의 옅은 소독약 냄새는 운동으로 고약해진 우리의 체취를 감추는 향수의 역할을 할지도….
수영 도중에는 비교적 낮은 온도의 수영장 물이 몸의 열기를 식혀주기에, 몸 안에서부터 타오르는 열기를 느낄 수 있는 건 수영이 끝난 후이다. 처음 수영을 마쳤을 당시에 느꼈던 이 묘한 상태가 떠오른다. 시원함을 유지하던 피부 표면의 감각을 조금씩 잠식해가던 내부의 열기. 이 감각을 어떻게 표현할 수 있을까. 한 겨울 노천온천에 몸을 담그고 있는 느낌? 추운 겨울 야외에서 달리기를 하며 몸을 덥히던 것과는 또 다른 기분이 든다. 겨울 운동에서 경험할 수 있는 쌕쌕, 하며 몰아쉬는 마른 호흡도 없고.
내 몸이 불타오르고 있어. 안에서부터.
이런 표현은 어떨까. 내 몸 안에서 장작을 태우듯 무언가가 산화되고 있는 느낌이다. 찾아올 시기를 조금 놓친 것 같은 이 뒤늦은 열기 덕분에 수영을 끝내고 돌아가는 길에는 온몸에 땀이 밴다. 설마, 수영으로 내 몸 안에 잠자고 있던 열정이 깨어나는 건가. 그간 침대에 웅크려 살며 무기력해져만 갔던 나의 삶이 생기를 찾다니!
백수는 보통 무기력하다. 무기력한 인간이기에 백수인 건지, 백수가 됐기에 무기력해진 건지 선후관계가 분명하지는 않다. 뭐라 변명하기도 구차할 정도로 게으른 백수가 있는가 하면, 자신의 노력을 평가받지 못하고 강제로 백수를 ‘당하고 있는’ 취준생도 많기 때문이다. 청년실업률이 역대 최고에 다다른 현 상황을 본다면 후자의 경우가 더욱 많을지도. 나 역시도 후자에 속했으면 하기도 하고….
슬프게도 어떤 상태이든 공통적인 특징이 하나 있다. 시간이 지날수록 자신을 감싸고 있던 무기력과 우울함이 그를 더 깊은 수렁으로 끌고 간다는 사실이다. 심지어 중력이라도 생긴 듯이 그 기운은 주변에까지 영향을 미치며 사람들을 그 검은 기운으로 끌어들인다. 짜증이 늘고 주변과의 마찰이 잦아지는 것은 경고신호다. 오랜 시간 그 상태로 방치되면 함께 하는 주변인의 표정이 변하는 것을 볼 수 있을 것이다. 격려와 위로에서 짜증과 불편으로. 특히 연애 중이라면 문제는 심각하다. 가장 가까운 사이기에 우울 기운이 가장 쉽게 전염되기 때문이다. 그 이후 상황은, 아... 당신의 경험에 맡기겠습니다….
이 부정(不正)은 다른 방법으론 해결되지 않는다. 최후의 해결책은 취업뿐! 그런데 친한 주변인들을 보니 취업 후에도 이런 기운은 틈만 나면 스멀스멀 다시 기어 올라오더군.
인간이 어떻게 이런 실존(實存)의 불안을 해소할 수 있으랴. 실존주의 철학자들은 이렇게 말한다. “결정된 미래가 없고, 정해진 본질이 없다는 사실이 불안을 야기할 수 있다. 그러나 이는 동시에 우리가 무엇이든 할 수 있는 자유로운 존재임을 보여준다.”라고. 멋진 말이다, 그분들이 취업 자리를 알선해주지는 않겠지만.
그들의 말에 따르면 막연한 앞날은 백수의 자유로운 특권이다. 특권이라니... 피할 수 없으면 일단 즐기는 척이라도 해야 하니까. 아침에 하는 수영은 이런 특권을 누리는 나의 방식이다. ‘아침’이라는 것이 중요하다. 부지런함과 성실함을 강조해야 주변인들에게 믿음을 줄 수 있으니까. 하지만 그보다 더 중요한 건, 이를 통해 자기 자신에 대한 무력감을 어느 정도 떨쳐버리는 것이다. 뭐, 그런 의미라면 강조점이 굳이 ‘아침’ 일 필요는 없다.
내 안의 무력감을 태워 열기를 만들어내는 일이라면 시간은 중요치 않으니까.
가만히 앉아서 하는 걱정은 백수의 불안만 가중하는 것 같다. 그저 한 번이라도 더 손발을 내저을 수 있다면 움직이는 수밖에. 불안과 무기력으로 가라앉지 않기 위해서, 한 번이라도 더 호흡하기 위해서.
경험적으로 수영을 하고 난 하루는 적어도 무기력에 빠지지 않는다는 걸 알게 됐다. 그렇게 움직이고 나면 내 안에 웅크리고 있던 무기력과 불안이 모두 타버리고, 그 열기가 오래도록 사그라들지 않기 때문일 것이다. 뭐, 사실은 몸 안의 탄수화물이나 지방이 타고 있는 거겠지만. 가끔은 눈에 보이는 거짓말이라도 자신을 속이는 게 더 나을 때도 있는 법이니까, 그냥 귀엽게 넘어가도록 하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