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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장재용 Jan 19. 2021

노는 데 빠지지 말자

2021.01.17 일요일의 기록

노는 데 빠지지 말자 (지난 일요일의 기록)

Martinique 섬에서 온 루브릭 아재가 직접 자신의 고향 섬 전통주Martinique 폭탄주를 제조하고 있다.


2016년 가을에 한국을 ‘달라뺀’ 이후 서너 군데 나라를 거치며 살고 있다. 낯선 곳을 억지로라도 적응하며 살다 보니 어느 순간 영토 개념이 사라지는 건 자연스런 수순인지도 모르겠다. 더해서, 지구라는 공 위에서 보내는 하루라는 시간적 개념과 삶이라는 공간적 관념은 얼마나 의미 있고 동시에 무의미한 것인가도 알게 된다. 그저 둥글게 허공을 빙빙 도는 게 지구의 미덕이고 한번씩 쏟아 붓는 폭풍과 내리치는 번개, 가끔 바다를 뒤흔드는 일을 주 업무로 삼았을 뿐이니, 지구 입장에선 한국이니 외국이니, 사니 죽니, 여기니 저기니 하는 유혐간택唯嫌揀擇이 없는 것이다. 다만 할 뿐, 그저 최선을 다한다. 뒷다리를 어설프게 쭈그리며 부끄럼 없이 똥을 싸는 개를 보며 삶에 최선을 다하고 있다는 생각, 지구나 개나 다르지 않다는 생각, 그런 생각이 들게 된 즈음, 내 마음 속 저 깊은 곳에서 느닷없이 올라와 이마를 쥐어박는 자각에 한 동안 나는 곤혹스러웠다. ‘나 또한 지구라는 행성 위에 살고 있는데, 왜 고작 이따위로 사는 걸까.’ 


지금, 우리는 누구나 생의 한 가운데 살고 있으므로 지금 생이 재미있는지 우울한지 슬픈지 기쁜지를 들여다보는 일은 그래서 중요하다. 산을 주제로 매주 글을 쓰고 있지만 산이라는 묵직한 무게 때문인지 글은 늘 비장하고 진지했다. 아니다, 산이 문제가 아니라 내 마음이 텐션으로 뒤덮여 있었는지도 모르겠다. 그래서 잊어버린다. 사소한 것은 사소하지 않다는 자각, 중요한 것은 중요하지 않다는 자각에 머물며 사는 게 좋겠다. 이번 주는 산도 잊고 무게도 던지고 즐거웠던 지난 일요일을 기록한다. 힘 빼고 살자. 


지난 주 어느 날이었다. 뒷집에 사는 소피 아지매가 우리 집 초인종을 눌렀다. (Sophie, 그녀는 우리 가족 앞에 느닷없이 나타난 디오니소스가 아닐까 한다. 일면식 없는 그녀의 첫만남에서부터 노래방 MIC를 잡고 춤추고 노래 부르던 어제까지, 눈을 감고 생각하니 그야말로 신이 인간의 모습에 들어가 나에게 말하려 했던 무언의 메시지를 전달하러 온 것처럼 그녀의 존재는 신적인 어떤 것이 있다. 그도 그럴 것이 지난 주 토요일 레이스 달린 하늘하늘한 흰색 원피스를 찰랑거리며 우리 집에 와서 한국에서도 본 적 없는 타로 점을 봐주었는데 아니나다를까 내 역마살을 진작에 알아 맞췄고 앞으로도 계속될 거라는 저주?도 서슴없이 했던 터다. Sophie, 지혜라는 이름의 뜻과 어울리게 카산드라를 능가하는 예언력을 갖춘 그녀는 프랑스 남부 엑상프로방스Aix-en-Provence에서 왔다고 했다) 그녀의 초청으로 마을 바비큐 장에서 펼쳐지는 일요일 점심 초대에 가게 됐다. 


사람들이 하나 둘 모이고 서로 인사를 나누는데 어느 순간 둘러보니 이렇게나 다양한 국적의 사람들이 모여 있을 줄 나는 알았던가! 아프리카 마다가스카르 섬 동쪽, 인도양 한 중간에 있는 프랑스령 레위니옹Reunion 섬에서 온 아지매와 카리브해 프랑스령 마티니끄Martinique 섬에서 온 간지나는 흑인 아재 루브릭, 동네에서 자주 가는 식당 주인 베트남 아저씨, 타이완에서 온 웬디 아지매, 프랑스 크록스(샌달의 호치민 공장에서 일한다고 한다. 이름은 까먹었다. 마침 그때 나는 크록스 샌달을 신고 있었는데 샌달에 브랜드 마크가 떨어졌다, 어디 갔느냐, 바꾸어라, 네 샌달만 바꿀게 아니라 너의 아내, 아들래미 딸래미 샌달도 새로 사주라던, 그 이후 ‘크록스’로 부른다)아재, 소피의 남편 노가다 세바스티앙(특별한 소득 없이 호치민에서 소피의 경제력에 얹혀 사는데 프랑스에선 무슨 일을 했었냐고 물으니 컨스트럭션 뭐라 뭐라 했다. 모두 듣고 보니 한국으로 치자면 ‘노가다’였다. ‘조가다’, 조선소 노동자의 아들로 태어난 나는 ‘노가다’ 일을 결코 폄하할 수 없다. 세바스티앙, 그는 자신의 일에 자부심이 대단했다. 건설현장에서 몸으로 부딪히며 살아낸 솔직함이 그대로 묻어 있는 그의 표정과 시원하고 털털한 마음 씀씀이에 마치 내 오랜 옛날, 나를 보면 항상 웃어주던 옆집 일용직 아저씨를 보는 듯 편안했다. 아지매, 아재, 아저씨라는 호칭을 썼지만 이들 모두는 삼십대 중후반이다). 


생전 처음 마셔보는 마티니끄Martinique 술과 피따pitta라는 케밥 비슷한 버거로 즐거운 점심을 즐기던 중 갑자기 소피 아지매가 일어선다. 참고로 마티니끄 술은 알코올 도수가 40%다. 소주 두 잔 정도의 양을 한꺼번에 털어 넣고 커피 한 모금을 마시는 게 이 술을 즐기는 멋이라 하여 어설픈 코리안의 곤조가 발동해 두 잔을 연거푸 마셨더니 세상이 아름다워 보였다. 자리에서 일어난 소피 아지매는 ‘나 하나 질렀어’하며 노래방 앰프를 꺼냈다. ‘헐’이다. 이 분위기 어쩔 것인가. 아내와 나는 마주보고 뜨악 하던 찰나, 이미 소피 아지매가 한 곡 뽑고 있었으니 우리에겐 익숙하고도 익숙한 노래방 문화가 그들에겐 이 땅에서 처음 접하는 노래 문화의 신세계를 발견한 것과 같았으니 한낮에 아무렇지 않게 서로가 모르는 노래를 서로가 모르는 선율로 부르고 또 불렀던 것이다. 


노래방이 펼쳐지고 ‘한 곡 불러라’는 그들의 성화에 결국 세계 각국에서 살다 지구가 좁다 하고 인연같이 모여 같은 동네에 살고 있는 사람들 앞에서 아내와 나는 ‘노래’를 부르게 됐던 것이다. 노래방에서도 주로 노래를 듣는 편이라 무슨 노래를 부를까 민망하고 부끄럽게 곡명을 고르면서도 ‘미친 거 아니냐’는 말이 끝없이 서로의 입에서 나왔다. 마침내 우리는 듀엣으로 노랠 불러재끼고 말았으니 어떻게 불렀는지 몰랐고, 누군가는 노래 부르는 우리 옆에 와서 몸을 비비며 춤을 췄고(나도 비벼야 하나, 순간 고민하고), 노래는 곡절 끝에 끝이 났고, 노래가 끝난 순간 모두가 일어나 기립박수를 치는 장면에선 소리는 사라지고 그들의 동작만 기억날 뿐이다. 긴장했던 모양이다. 다른 사람의 음성을 알아 차리기 무섭게 다시 돌아오는 차례, 뭔가 잘못되고 있는 느낌은 계속된다. 


라오스, 베트남 거리에서 고막을 찢는 소음 때문에 혐오했던 앰프 고성방가를 선 보이게 될 줄은 나도 몰랐으므로 역사적인 날이 아닐 수 없었으니 다시 돌아온 차례에선 ‘이제 나도 모르겠다, 그냥 놀자’ 하며 마이크를 잡았다. 긴장이 뭔가, 허리띠를 풀었다. 아닌 게 아니라 그들은 나의 음정, 박자를 모를뿐더러 내가 부르는 노래를 알지도 못했고 오로지 노래가 끝나면 기립박수로 ‘너 가수였구나’ 하는 칭찬과 샤우팅으로 내 안의 저 밑에서 올라오는 보컬의 씨앗을 싹트게 했던 것이다. 솨리 질러, 일요일 한 낮에 ‘내일은 없다’고 노는 그들의 정신세계가 내 안에 고스란히 담긴 날이었다. 노는 데 빠지지 말자. 슬기로운 지구생활의 진리다. 


그나저나 아직도 귓가에 아내와 불렀던 ‘삐딱하게’가 맴돈다. 밤에도 눈감으면 멀리서 희미하게 들려오는 ‘전설의 고향’의 소쩍새 울음처럼 삐딱하’새’가 들린다. 환청이 계속돼 어제 밤엔 간만에 이불 킥을 했다. 

매거진의 이전글 ‘할말’*을 마무리 하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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