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꺼이 비 맞는 삶
간 밤, 쏟아지는 비에 지구가 촉촉하게 젖은 자신의 몸을 부르르 떨쳐내는듯 사이공에 우기가 시작됐음을 알린다. 매일 한 번씩 내리는 장대비에 속수무책 당할 때가 많지만, 시원하게 내리고 나면 대기는 상쾌하고 무더위는 한풀 꺾인다. 조금만 높은 곳에 올라가 내려다보면 비구름이 다가오는 장면을 볼 수 있다. 장관이다. 회색 구름이 파란 하늘 한중간을 떠돌며 비 내리는 곳과 비 내리지 않는 곳을 극명하게 가른다. 경이로운 광경이다. 거대한 비구름을 만들고, 지각을 비틀고 육지와 바다를 관제하는 지구가 자신의 주요 업무를 보고 하는 것 같다.
주말 한가한 오후, 장대비가 창을 두드린다. 빗소리를 들으러 마당 구석으로 나가 자리를 잡는다. 쏟아지는 비에 붉은 개미들은 혼비백산이다. 푸른 도마뱀이 길목을 지키며 긴 혀를 뽑아 개미들을 가로챈다. 열대 지방 커다란 파초 잎에 후두둑 비 때리는 소리를 듣고 있노라면 마음이 차분하게 가라앉는다. 수필가 이태준은 자신의 수필집 ‘무서록’에 ‘파초’라는 글을 쓴 적이 있다. 여름날 서재에 누워 파초 잎에 후득이는 빗방울 소리를 ‘가슴에 비가 뿌리되 옷은 젖지 않는 그 서늘함’ 이라 표현했다. 기가 막힌 표현에 무릎을 치고 이태준의 서재가 지금 나의 마당으로 바뀐 동일성에 감탄한다. 가슴에 비를 맞으며 수필가 ‘글빨’을 저울질하는 주말 오후의 호사다.
빗소리를 들으며 나도 모르게 동공이 풀린다. 시선은 한 곳으로 고정되고 생각은 지워진다. 그 사이 딸아이는 곧 사라질 비를 맞아 보겠다며 마당 한가운데로 뛰쳐나간다. 제자리에서 양팔을 벌리며 돈다. 지구의 일을 만끽하는 아이가 부럽다. 지구가 만들어낸 아이와 아이가 딛고 선 지구가 같은 몸처럼 보인다. 파초 잎과 저 아이가 문득 동질적인 원형을 나눈, 한 몸인 것 같다. 떠오른 생각이 어디서 본 듯하여 희미한 단서로 한참을 더듬어 찾으니 아하, 조지프 캠벨이다.
‘어느 날 해변을 걷던 중 나는 신기한 경험을 목격했어요. 황소 모양의 원형질이 풀 모양의 원형질을 먹는 것 같았고 새가 물고기를 잡아먹는 광경도 새 모양의 원형질이 물고기 모양의 원형질을 먹는 것 같았어요. 많은 사람에게 만물의 근원으로서의 이런 놀라운 심연 체험이 있을 겁니다.’ (조지프 캠벨, ‘신화의 힘’ 中에서)
태어나 삶을 살아야 하는 생명으로서의 자세는 비가 오면 비를 흠뻑 맞아들이는 것일 테다. 많은 제약과 조건들을 거부하지 않고 받아들이는 자세, 말하자면 긍정의 삶을 살려는 의지 같은 것. 비를 맞고 스스로 커가는 파초처럼, 장대비를 맨몸으로 맞으며 춤을 추는 아이처럼, 삶은 그런 신성한 긍정이 추동하는 것이라 믿는다. 썩은 얼굴을 하고 이곳저곳을 정신없이 다니는 바쁜 삶이 아니라, 사무실 모니터를 지켜보는 무채색 삶이 아니라, 맞닥뜨릴 두려움에 초라한 시민성으로 사는 옹졸함이 아니라, 인화성 짙은 일들을 애써 피해가는 금욕주의적 삶이 아니라, 몸으로 비를 맞고, 이리저리 뛰어다니며 소리 지르는 푸른색이 내 삶을 물들일 때까지 살아 보는 일, 그것이 삶을 다 사는 것이라 믿는다.
비가 그치고 실루엣이 분명한, 표백한 듯 하얀 구름이 온 하늘에 뭉글거렸다. 그러다 다시 쏟아지는 장대비, 고요한 끝에 다시 소란스러워진 마당으로 이젠 직접 걸어 나가본다. 혼자 서서 팔을 뻗었다. 물컹물컹 보드라운 땅, 땅을 발음해 본다. 이응처럼 둥글고 쌍디귿처럼 믿음직하다. 밟을 때마다 발자국이 생겼다 사라지는 지구의 속살. 고개 들어 하늘을 보니 비가 미사일 궤적처럼 내 얼굴에 꽂힌다. 이토록 풍요로운 미사일이 있을까. 손을 허리춤에 걸치고 비가 그칠 때까지 마당 잔디를 맨발로 거닌다. 마치 나를 기다린 듯 딱 내 몸무게만큼의 중력을 내뿜는 지구를 느낀다. 그리고, ‘나는 나를 기다린다’는 죽은 철학자의 말이 육당의 시와 오버랩 되며 내게로 와서 콕 박힌다.
가만히 오는 비가 낙수져서 소리하니
오마지 않는 이가 일도 없이 기다려져
열릴 듯 닫힌 문으로 눈이 자주 가더라 –육당 최남선-
저 문을 열고 들어가면 삶이 환하게 밝아올 것 같지만, 삶은 늘 새로운 문에 들어서려 할 때 문지방에 걸려 넘어진다. 그렇게 매번 넘어졌기 때문에 졸아들고 작아지고 낮아진다. 그것은 행복하고 안락한 삶을 열어 재치는 문처럼 보이지만, 알고 보면 더 깊은 삶의 골짜기로 들어서는 일이었고, 달콤한 현금계산의 길로 던져져 보기 좋게 갈려 나갈 삶의 나락이다. 아, 나는 이제 알겠다. ‘나는 나를 기다린다’는 어느 철학자의 말은 나를 향해 열려 있는 모든 세상의 문을 닫아 버릴 때 나타나는 사건이다. 모두가 뛰어 들어가는 저 문이 아니라 뛰는 것을 중단하고 돌아서는 것이다. 다시 말해 비 오는 날 우산을 쓰는 삶이 아니라, 우산을 잃어버릴까 신경 쓰며 내 앞에 벌어지는 사건들에 눈을 감아버리는 삶이 아니라, 사건에 겁먹지 않고, 비를 맞으며 우산 따위는 잊어버리고 기꺼이 몰락으로 걸어 들어가는 스피릿이다. 그것이 ‘나’라는 프로젝트 하나를 근사하게 만드는 일이자, 나를 다 쓰고 가는 일임을 알게 된다.
생각에 생각을 이어가는 비 내리는 사이공의 오후, 다시 동공을 제자리로 돌려 놓는다. 나를 잊을 정도로 멍을 때린 호사스런 오후다. 근데 뭔가 불안하다. 아차, 빨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