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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장재용 May 26. 2022

반딧불이가 나타났다


반딧불이가 나타났다


여기, 무더운 나라에서 우리는 지난 겨울을 보냈다. 벚꽃 피던 올해 봄도 여름이었고 여름에 접어드는 지금도 여름이다. 올 가을도 이곳은 여름일 테고 거리에 캐럴과 크리스마스 전구들이 반짝거릴 올 겨울도 여름일 테다. 철이 없을 것 같던 이곳에서 지난 여름, 나는 내 앞에 등불 같이 나타난 반딧불이를 보며 이곳에 철 있음을 알게 됐다. 바이러스와 함께 지난한 여름이 계속되던 지난해 사이공에서 바이러스에는 아랑곳없이 그것들은 스스로 터져 나오는 빛으로 반짝거렸다.



오로지 별만이 스스로 빛을 내는 줄 나는 알고 있었다. 스스로 타는 것이 별이기 때문이다. 별은 결코 남의 행성에서 세어 나오는 빛으로 반짝이지 않는다. 별은 자신을 태워 나오는 빛으로만 반짝인다. 그리곤 제 명을 다할 때까지 태운다. 자기 속에서 터져 나오는 빛으로 타는 것이 별이라고 나는 찰떡같이 믿고 있었다. 나는 별일까, 그렇지 않은 것 같다. 내 나라에서나 낯선 나라에서나 소시민으로 살고 있는 나는 더는 빛나지 않는다. 다른 사람들은 모두 빛나는 별 같이 보인다. 빛나지 않는 건 나 혼자인 것만 같다. 그런데 아, 여기 스스로 빛나는 것이 하나 더 있구나. 반딧불이, 스스로 빛나는 별 하나가 내 앞을 지나가며 조용히 말을 건넨다.



‘넌 혼자가 아니야.’



고향을 떠나와 낯선 곳에서의 여름이 한 두 해가 아닌데 유난히 맞닥뜨린 불안과 낮아진 외로움에 허덕이던 그때 반짝거리는 반딧불이를 계시처럼 만났다. 이후 ‘겨울의 여름’이 막 지날 때부터 나는 ‘봄의 여름’ 끝 무렵을 손꼽아 기다렸던 것이다.



지난 주 저녁산책 길에 드디어 반딧불이들이 나타났다. 한 두 마리가 아니었다. 반딧불이 떼가 내보폭에 맞추어 나란히 걸으며 모여 들었다. 나에게 위로를 건냈던 지난해 그 조그만 녀석들이 나타난 것이다. 내 심장은 북소리를 내며 그것들과 같이 걸었다. 어둠 속에서 숨을 멈췄고, 마침내 걸음까지 멈췄을 때, ‘창세기부터 지금까지 별의 역사를 요약해서 보여주는 현란한 다큐멘터리’를 나는 보았다. 녀석들은 스스로 빛을 내고 있었다. 지상에 떨어져 나와 걸음을 맞추는 별, 숨이 멎을 것 같은 황홀함을 느끼고 있다는 걸 저들은 알까, 알아줬으면 했다.



반딧불이가 나타났다. ‘이불의 모퉁이를 붙잡고서 달디단 꿈을 소망할 쓸쓸한 이, 술이 술을 마시며 퀭한 눈동자로 눈 오는 창 밖을 바라보고 있을 술꾼, 이 밤에 별과 별이 뜬금없이 만나서 별자리를 만드는 경이로움에 새삼스러운 감탄을 하고 있을 먼 나라의 천문학자, 아픈 부위가 밤새 아프고 저린 부위가 밤새 저릴 환자,’ 그들에게 반딧불이가 나타났다고 말하고 싶었다. 어두운 길 밝히며 더듬거리며 걷는 길에 녀석들은 나란히 따라온다. 내 어깨를 틀어잡고 내 눈을 똑바로 보며 외로워 마라는 숲 속의 의사를 전령처럼 전달한다. 반짝. 불안이라는 대지 위에 삶이라는, 언제 무너져도 이상하지 않을 가건물을 허가한 세상에 고함 한번 내지르지 않고 사는 우리에게 녀석들은 스스로 타보라는 말, 내 것으로 한번 빛을 내보라는 말을 전달한다. 반짝. 별과 내가 일직선이 되어 나누는 말이 듣고 싶은가, 나를 똑바로 보라. 반짝. 반딧불이가 나타났다.



여기 이곳의 이맘때를 기억하게 되는 건 아마 너로 인해 각인된 기억일 테다. 살랑이는 바람을 맞아가며, 푸른 뱀의 새끼가 길 위를 구비쳐가고, 멀리 날아오는 풀냄새와 붉은 흙 냄새, 배가 뒤집어진 채 죽은 개구리, 그 위로 일렬 종대 띠를 만들며 행진하는 붉은 개미, 나무 뒤에 숨어 빼꼼히 쳐다보며 나를 반기는 딸꾹질 같은 카멜레온 소리, 듣지 못하는 것을 듣게 했고, 볼 수 없는 것들을 보여준 너로 인해 이 모든 건 아름답게 기억될 거라 말하고 싶다.



불행으로 돌진해도 된다, 그러나 불나방은 되지 마라, 남의 불을 좇지 말고 너의 불을 만들어 태워야 한다. 그래야 삶은 단단해질 테니 너를 태워 빛나라, 빛나라, 그리고 빛나라. 그리하여 누구도 닮지 않은 네 제국을 세워라. 너는 그리 될 것이다. 그것이 삶을 남김없이 다 쓰고 가는 것이라고 네가 반짝이며 말했을 때 마지막 레이저 불빛을 쏘며 너는 숲으로 돌아갔다.



그리고 흐르겠다. 산이 마침내 출렁이는 바다에 닿고 제 살을 깎아내는 파도조차 끌어안으며 유장했던 삶을 조곤조곤 얘기하는 산의 능선처럼 흐르겠다. 인생 곡절을 감내하고 강물같이 흘러 바다에 닿겠다. 깊고도 넓었던 여정을 반짝이는 네 흉내를 내며 나는 따라가겠다. 너를 흉내 내보는 것도 좋을 것 같다는 생각을 한다. 누군가 닮으려면 그의 흉터까지 닮아야 한다 하지 않던가. 별의 흔적인 너를 나는 기꺼이 닮겠다. 그 작은 날개가 튼튼한 날개로 변하고 어깻죽지에서 돋아나 나보다 커지고 결국엔 지구보다 커져서 우주의 점으로 박힐 너를 나는 알고 있다. 나는 네가 별이라는 걸 알고 있다. 여기서 들었던 내 이야기를 기억해 다오. 별이 되어 다오. 마침내 네가 내려내 볼 때 별과 함께 걸었던 내 얘기를 역사처럼 말해 다오.



오늘 저녁, 산책길에 반짝거리는 너와 놀다 헤어지게 되면 오랜 옛 친구와 작별하듯 혼자 중얼거려 볼 예정이다. 먼 별로 올라가는 ET처럼 작별하며, 손가락에 불을 켜 내 이마에 너의 불빛을 갖다 대고 너는 말할 거야. “바로 여기에 있을게” I’ll be right her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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