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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장재용 Dec 18. 2019

‘할말’*을 마무리 하며

할말’*을 마무리 하며 

(* 할말을 라오스 & 사이공에 두고 왔어)


자전거를 타고 퇴근하던 날, 억수 같은 비가 내렸다. 내리치는 천둥이 소리의 어른 같다. 내가 뭔가 잘못한 것 같은 마음으로 하염없이 비를 맞았다. 소심하게 비 맞으며 자전거 페달을 밟아 가는데, 웅크린 어깨를 펴야 한다는 목소리를 들었다. 순간 질주가 시작됐다. 비 맞는 퇴근길은 갑자기 신이 났다. 앞이 보이지 않을 정도로 몰아치는 빗속에서 더 힘차게 레이스를펼친다. 비는 내 눈을 때리고, 길은 빨라지는 속도에 더욱 분간할 수 없게 됐다. 옷은 이미 젖었고 몸 속을 타고 들어온 비는 계곡이 되어 내 온몸을 쓸고 다닌다. 쓰고 있던 마스크를 벗어버린다. 홀딱, 쫄딱 젖어 버린 몸에, 빨라지는 자전거 속도에 나는 정신을 놓고 주변의 수많은 오토바이 소음 속에서 외마디 비명을 질렀다. 비명의 성분은 분노 20%, 기쁨 30%, 반항 20%, 자유 20%, 부끄러움 10%, 아! 


지난 1년, 라오스와 베트남 이야기는 그날 외쳤던 내 비명의 성분과 같았다. 꼭 그랬다. 유치한 감정과 자기독백이 여과 없이 전자메일을 통해 배달됐다. 부끄러운 중에 감사해야 할 일은 내 어줍잖은 이야기들을 독자들은 품어주었고 답장과 답신을 나누며 오히려 내가 단단해진 것이다. 낯선 곳에서 좌충우돌 했던 3년보다 한 걸음 물러나 찬찬히 회상하고 삶을 갈무리하며 썼던 지난 1년이 더 경이로웠던 이유다. 올해 1월 1일, 마음편지를 시작하며 1년간 라오스와 호찌민 이야기를 나누어 쓰기로 약속했었다. 덜컥 맡아버린 수요일 마음편지에 두려움이 앞섰다. 한 주에 한 번 쓰는 글을 매일 쓰고 있다는 착각을 할 만큼 압박은 컸다. 압박이 큰 만큼 기쁨도 컸고 이젠 그 부담을 즐길 정도까지 됐다. 생활의 일부가 된 것이다. 마음편지 내가 가는 길에 훌륭한 동반자가 되었다. 맞다, 길이 됐다. 


우리는 항상 길 위에 있다. 길이 아닌 곳에 있어 본 적이 없지 않은가. 늘 우리는 생의 한가운데를 지나고 있는 것이다. 길은 지금의 정신이다. 회고, 회상의 무서움은 괴롭고 힘들고 공포스러웠던 그때를 지금의 정신으로 재해석 해버린다는데 있을 테다. 지난 일을 생각하며 글을 쓴다는 것은 회상에다 일종의 윤색과 각색까지 더해지는 것이니 그것이 나의 이야기라면 피해야 할 일이다. 중요한 것은 지금도 우리는 길 위에 있다는 것. 어디로 가는지 모르는 길, 다만 그 길 위에서 ‘할말’들은 조금씩 생겨나서 부끄러운 줄 모르고 떠들고 있는 거라 생각한다. 호찌민은 지금 내 길의 배경화면이다. 호찌민에 있으며 ‘지금의 정신’으로 ‘지금’을 쓰기엔 감당하기 힘든 무서움과 윤색된 아름다움이 뒤섞인다는 걸 알게 됐다. 누구나 그렇듯 지금 여기, 현재는 살려고 별 짓 다하는 째째함이 살아있는 순간이다. 이 지난한 일상성을 관조의 시선을 한 채 누그러뜨릴 순 없다. 심리적 유치함을 스스로 정제할 수 없기도 해서 호찌민 이야기는 훗날로 미루고 ‘할말’을 남겨 두고자 한다. 


그러나 ‘길 위에서’ 내가 천착해야 할 한가지가 남았다. 언젠가 글에서 월급쟁이 정체성을 부러뜨린 뒤 다음 인생으로 넘어가야 한다는 스스로의 약속을 잘 알고 있다. 이 주제에 관해 다음 글부터 2020년의 반을 할애하려 한다. 남은 반은 ‘산’으로 갈 생각이다. 이유는 이렇다. 단 한 순간이라도 육체의 조건을 벗어난 절대 자유에 이르고 싶었다. 그런 자유가 있는지, 없는지, 겪게 될지, 아닐지 모르지만 나를 억압하는 억압까지 다시 억압하는 이 세계에서 자유라는 것보다 달콤한 열반이 있을까 싶은 것이다. 죽지 않고서라도 이를 수 있는 단 한번의 찰나, 우주를 관통하는 진홍 빛 끝없는 거품 속을 유영하는 그 순간을 나는 갈구했다. 그러나 그런데 말이다, 육체를 떠난 절대자유는 없는 것 같다. 죽지 않고선 도달할 수 없는 북극성인 걸 알게 됐다. 어쩌면 일생을 통틀어 얻을 수 없는 것이 자유이기 때문에 기를 쓰고 달려드는지 모른다. 그렇다면 자유를 향한 노스텔지어 방식은 달라져야 할 테다. 내가 자유로울 수 있는 다른 방식, 그러니까 육체라는 조건을 순간적으로 잊게 되거나 반대로 육체라는 조건을 한계까지 끌고 가 자유에 가까운 상태에 이르게 하는 것을 고민하던 차였다. 산이었다. 산은 그렇게 자유를 준다. 자유로운 나를 표현할 수 있는 방식 중에 하나다. 글 또한 나에게 자유다. 흰 원고지에 써 내려가며 전에 없는 표현과 문장을 조합해 나가는 것, 글은 자유로울 수 없는 내가 자유를 갈구하고 표현하는 가장 나다운 방식이다. 이 두 가지, 산과 글이 합하여 질 때, ‘산’에 관한 ‘글’을 써 내릴 때 나는 가장 뜨겁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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