선천성 그리움
어쩌다 나는 낯선 땅에 오게 됐고 3년을 넘게 돌아가지 못하고 있지만 고향은 더 그리워지기만 한다. 한국에서 책을 안 읽은 것은 아니지만 조금은 전투적인 독서, 생산적이어야 한다는 강박의 글 읽기였다. 이 곳에서 마음을 나눌 친구가 없고 마음 맞는 사람도 많지 않아 잔잔하게 대화하는 독서의 맛을 알게 됐다. 누군가와 한 없이 말을 하고 싶을 때, 내 생각을 마음껏 풀어내고 싶을 때 책을 꺼내 놓고 내 생각을 동시에 갈무리해가며 읽는다. 책에 내가 포섭될 때도 있고 내가 읽는 글을 반박하며 주장을 펼칠 때도 있는가 하면 서로 동조해 마지 않으면서 친구가 되기도 한다. 그런데 친구가 늘 그렇듯 싸울 때가 있다. 책마저 보기 싫은 날, 동공에 힘을 풀고 생각마저 지우고 있노라면 내 부끄러운 지난 날이 나를 덮친다. 잃어버린 줄 알았던 기억이 연약한 불씨처럼 되살아나더니 어느새 나를 휘감고 활활 타오르는 것이다. 이를 어쩌나 저를 어쩌나, 그날 그때 그 사람에게 미친 듯이 미안한데 사과할 길이 없다. 무거운 마음 하나가 또 쌓인다. 친구 없는 곳, 고향을 떠나 비로소 알게 된다. 있을 때 잘하자, 라고 쓰니 느닷없이 떠오른 사람, 고향 생각. 이제부터 쓰여질 두서 없는 센티멘탈한 글을 용서하시라.
아버지는 오래 전 해외에서 일하신 적이 있다. 내가 라오스와 베트남을 전전하고 있어 해외에서 일했던 적이 있는 아버지와는 나눌 이야기가 생기게 됐다. 어떻게 가셨나 물었더니 대뜸 “해외에서 일을 마치고 한국으로 돌아와보니 일이 없었다. 나는 그때 어디 떨어져 죽으려 했다. 회사에 적을 두고 있었지만 공사를 앞에 두고 시작을 하니 안 하니 하던 차에 일은 기약이 없었고 어디 다른 데 가서 일할 수도 없고 죽을 맛이었다. 내가 현장에서 떨어져 죽으면 당시 1억은 나왔을 테니 그걸로 느그 공부시키고 하면 될 것 같아서 그러려고 했던 적이 있다.” IMF 사태의 광풍이 이 나라를 몰아 칠 때였다. 세 남매가 모두 대학을 다니고 있었던 때였고 일은 없었고 돈을 벌어오지 못하는 날들이 길어졌다고 했다. 먹고 사는 일은 이렇게 엄정하다. 죽는 일과 같기 때문이다.
지난 여름, 일이 있어 오랜만에 혼자 고향 방에 하룻밤을 자게 됐다. 실로 오랜만에 ‘영도다리’를 아버지와 함께 걸어 넘어왔다. 아버지와 나와 그리고 옛날의 어린 나와 같이 걸었다. 아침에 일어나 집을 나서기 전 유년의 때가 그대로 묻어 있는 집을 천천히 둘러본다. 연구자처럼, 주의 깊은 시선으로 내 유년의 환청 같은 웃음만 남은 빈집 같은 집을 돌아본다. ‘몰락한 세계의 설계도’를 손으로 더듬는다. 형님과 같이 쓰던 좁은 방의 맨들맨들해진 나무 창문틀, 그 틀에 걸터앉아 노래 부르던 장면이 나타났다 사라진다. 화장실 세면대 위에 드러난 얼룩, 무시로 그은 칼집 흉터를 그대로 간직한 책장, 먼지를 두께로 품은 베란다 내 할매 장독, 몰락을 이겨낸 벽과 기둥들을 슬프게 환호하며 바라본다. 너는 ‘행복할 수 있었는데 그 기회를 놓치고 말았어’ 말하는 것 같다.
다시 베트남으로 돌아가기 위해 공항으로 나서던 길, 버스를 잡지 않고 일부러 걷는다. ‘산만디’에서 바다까지 걸었다. 어릴 적 뛰어 놀던 곳을 걸어 내려갔다. 어머니에게 귀를 잡혀 나오던 ‘오뚜기 오락실’. 구부정한 할아버지가 ‘난닝구’ 바람으로 내려오는데, 그 옛날의 젊고 혈기 왕성하던 주인 아저씨다. 동전을 넣는 곳에 긴 철사를 구부려 튕기면 기계가 동전이 들어온 것으로 착각하고 ‘한판’을 서비스했다. 주인 아저씨는 불을 켜고 현행범을 수배했고 우리는 필사적으로 아저씨의 시선을 분산시켰다. 흘레 붙는 개들을 동백꽃 색깔의 ‘다라이’에 뜨거운 물을 가득 담아 부어 버리던 오뚜기 오락실 아저씨. 그날, 아침에 우연히 본 아저씨를 나는 먼 곳에 떨어져 움직이지 않고 봤다. 이제는 할아버지가 된, 늘어진 아저씨의 난닝구가 고향, 고향, 고향 세 번 외치는 것 같다.
우리 할매 술 드시는 날이 1년에 세 번 있었다. 설과 추석날 아침 음복, 부모 앞선 아들 기일에 한번. 살아 계셨다면 나에겐 삼촌이 되실 텐데 내가 태어나기 전에 돌아가셨으니 나는 뵌 적이 없다. 스무 살, 군에서 돌아가셨다 들었다. 그렇게 착한 아들이었다고 했다. 기력이 허락했던 마지막까지 매년 아들의 기일에 국립묘지 현충원에 다녀 오셨더랬다. 나는 가끔 우리 할매를 모시고 다녀온 일이 있었는데 어린 나는 1년에 세 번 술을 드시는 날 중 하루였던 그 날의 우리 할매가 그렇게 싫었다. 죽은 아들 묘지석을 붙들고 못 간다고 목놓아 울었다. 내려오는 버스 안에서 혼을 놓고 고함치듯 노래를 불렀다. 할매는 아들내 집에 갔다가 매번 아들을 보지 못하고 내려 왔는데 제정신일 수 있겠는가. 노래로, 울음으로 풀어 내며 최대의 자제력을 유지했던 것이다. 우리 할매는 강했다. 아들을 앞세우고도 삶에 흐트러짐이 없었다. 새벽 4시면 어김없이 일어나 82번 버스를 타고 밭일을 나가서 밤 9시 노곤한 노구를 이끌고 어김없이 돌아왔다. 집에 돌아오면 현관문을 열자마자 털썩 주저앉았는데 하루의 노동이 얼마나 고된지 짐작한다. 손자만큼은 시원한 바람이 나오는 사무실에서 일하는 사람이었으면 했던 우리 할매는 내 첫 직장을 잡았을 때 물었다. “거는 ‘에아코니’ 나오는 데가?” 그렇게 번 돈으로 손자 용돈 주고 맛 나는 것 사맥이고 남들한테 기죽지 않게 소풍 때 사이다도 사준 것이다. 나는 그런 우리 할매에 한 번도 살갑지 못했으니 살면서 가장 후회되는 일이다. 있을 때 잘하자,는 말을 괜히 꺼내어선. ‘용아’ 하고 부르던 우리 할매 생각이 유난한 호찌민의 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