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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장재용 Oct 27. 2021

산과 미운 나

산과 미운 나

매일 아침 출근하기 위해 세면대에 고개 처박고 머리 감는 일이 문득 넌더리가 났던 것이다. 그런 불안한 날에 배낭을 들쳐 메고 산에 오르면 방금까지 내 배후에 있던 무대장치는 무너진다. 나를 부르는 이름들이 빠지직 소리를 내며 사라지고 세계 하나가 붕괴한다. 나와 세계는 부조리를 사이에 두고 팽팽하게 대치하다 나의 일방적인 도피 선언에 허무하게 승부가 갈린다. 


사실 이 세계는 나와 다투지 않는다. 다툴 겨를도 없을뿐더러 내 주변을 짓누르면서도 침묵으로 일관하는 무엇, 그 모든 것의 주체를 알지 못하기 때문일 텐데 주체를 알 수 없는 대신 어느 순간 세계를 내면화시킨 내 안에서 불현듯 저 밑에서부터 ‘아니’라는 음성이 북받쳐 올라올 때 거울에 금이 간다. 금이 간 사태는 전손을 예고한다. 회사 사무실, 집, 출퇴근 지하철 안에서 왔다리 갔다리 하는 일상의 이미지들이 쨍그랑 소리를 내며 깨지는 것이다. 이제 오로지 ‘나’만 남게 되고 두 발로 가는 길만이 나의 길이 된다. 산을 홀로 올랐다. 


홀로 산을 오르는 사태는 세계 안에서 부조리와 섞여 들어가는 나를 빼내는 일이다. 누군가에게 불리어지던 나로부터 이름 없는 세계로 들어가는 일이다. 알튀세르의 호명 테제는 홀로 걷는 산과 같다. 관계는 이름을 만들어낸다. 관계는 체제를 만들고 관계 속의 나는 관계가 만들어낸 이름으로 불리어지는 것이다. 세상에 존재하는 이름만큼 관계가 존재하고 그 관계는 모두 닮아 있다. 이때 다른 사람들이 사는 대로 살지 않게 되는 건 차라리 형벌이다. 이 세계가 만든 관계와 무관한 존재로 단절된 나를 알게 되는 건 오히려 무서운 것이다. 


자아를 발견하라고 말하는 사람은 자아를 발견했을까? 자신을 찾아 나서라고 말하는 사람은 자신을 찾았을까? 그 무섭고, 힘들고, 사나운 삶을 거침없이 살아라 말하는 자들은 무엇에 기댄 자신감일까? 나와 이 세계의 관계가 깨어지고 홀로 암흑 속을 전진할 때는 처절한 외로움을 견뎌야 한다. 자신의 두 발의 자유를 얻는 대신 모든 조건은 바닥이어야 한다. 자유로운 결정은 무섭고 외롭기 때문에 사람들은 자유롭지 않게 사는 법을 택한다. 노예로 사는 게 편하기 때문이다. 


부디 나이 먹었다고 영리하고 지혜로운 척하지 말자. 생긴 대로 사는 것은 지혜롭게 사는 것보다 훨씬 어렵다. 사사로운 소확행 류의 자유가 아니라 삶 전체가 몰락할 수도 있음에도 기꺼이 대자유를 택하는 자의 무대장치 없는 거친 삶에 언제나 경배를. 집 따까리에 재산 쏟아 붇지 말고 두 발로 공부하고 여행하는 삶에 쏟아 붓기를. 홀로 걷는 산에 나와 별빛 사이에 아무것도 없기를. 온전한 나를 나 스스로 견딜 수 있기를. 미운 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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