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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장재용 Nov 02. 2021

알피니즘에 관하여

알피니즘에 관하여


알피니즘을 말하기 전에 ‘이데올로기’라는 바닥부터 파헤쳐본다. 진리라 믿는 의식이 정당성을 찾아다니다 발견하는 것이 데이터다. 이데올로기는 인간의 객관성과 가치일반, 개념에서 출발해 세계에서 찾아낸 환상 구조다. 실체 없는 환상이 개념체계로서 모습을 갖추면 이데올로기가 되고 이데올로기는 그것을 진리라 믿는 인간들에게 본격적인 의식으로 작용한다. 


가라타니 고진柄谷行人이 ‘진리는 객관적인 데이터에 의해 확립되는 것이 아니다. 반대로 그것을 진리로 삼는 인식론적 패러다임이 데이터를 발견한다. 따라서 이데올로기란 진리의식이다.’라고 말할 때 이미 니체의 문제의식, 즉 ‘무엇이 말해지고 있는가’가 아니라 ‘누가 말하고 있는가’를 포함한다. 


이 문제의식을 그대로 ‘알피니즘’에 겹쳐보자. 용어의 태생적인 환경이 18세기 유럽, 그 중에서도 대혁명 직전의 프랑스임을 생각하면 알피니즘이라는 이데올로기의 발언 주체는 17세기 과학문명을 발전시켜온 ‘근대 유럽인’이라 할 수 있다. 그들은 누구인가? 인류 최초로 인간을 자연 앞에 당당하게 ‘과 and’를 써넣고 인간’과’ 자연을 같은 레벨의 동류항에 놓기 시작한 사람들이다. 산업혁명과 프랑스대혁명의 이중혁명을 거치면서 자연과학의 힘과 정치적 자신감으로 넘쳐나던 때다. 항해 기술의 발달과 위력적인 살상무기로 전 세계를 누비며 식민지 복속을 이어갔으며, 대서양 삼각무역을 통해 인간이 인간을 상품으로 만들고, 피와 불로 쓰여진 시초축적기의 ‘자본’으로 역사상 유례없는 생산력을 가진 오만한 인간들이 탄생했던 시기였다. 


그들의 충혈된 시선이 천천히 산으로 옮아간다 생각해보라. 우뚝 서 있는 산은 여전하지만, 산을 향하는 주체, 인간의 생각은 변했다. 신처럼 거대했고 범접할 수 없었던 산은 그때부터 정복의 대상이 된다. 알피니즘이라는 이데올로기는 이 시대에 태어났다. 이제 인간은 그들 눈 앞에 우뚝 서있는 산에 경배하는 대신 산 꼭대기를 향해 주먹을 내민 것이다. 


근대 등산은 유럽 알프스에서 시작됐다. 알피니즘이란 말도 ‘알프스 Des Alpe’에서 탄생했다. 시초는 1786년 알프스 최고봉, 몽블랑(4,807m)을 프랑스의 미셸 빠꺄르와 자크 발마가 오르면서 시작된다. 실제 그들의 몽블랑 초등은 당시 탐험가였던 오라스 베네딕뜨 드 소쉬르가 내건 상금을 타는 게 목적이었다. 몽블랑 초등 이듬해 1787년 드 소쉬르 자신도 이 산을 오르며 빙하 연구 등 학술적인 기록 등을 인정 받아 알피니즘의 효시로 등극한다. 프랑스 산악마을 샤모니에 가면 여전히 이들의 동상이 몽블랑 정상을 바라보고 있다. 


이후 알피니즘은 시대가 변하며 다양한 의미로 해석됐다. 인간은 더 높은 산으로 향했고 여전히 산을 정복의 대상으로 바라봤다. 히말라야의 높은 산들이 국가주의의 각축장으로 변질될 때 산은 그대로였지만 알피니즘 이데올로기는 극에 달했다. 그때의 알피니즘은 높은 산이었다. 뒤늦게, 산이 더는 정복의 대상이 아닌 것이 됐을 때 알피니즘은 오르는 행위 자체를 의미했다. 이후 시대가 지나며 얼마나 빠르게 오르느냐, 얼마나 어려운 길로 오르느냐, 얼마나 극한의 등반을 추구했는가에 알피니즘 해석에 대한 방점이 찍히기도 했다. 지구상에 미답봉이 없어진 근래에는 높이보다는 자연의 불확실성에 맞서는 인간의 태도 즉 한계 극복을 추구하는 의미로 읽혀 지고 있다. 


그러나 여전히 알피니즘의 해석은 산을 오르는 사람만큼 다양하다. 그것은 ‘무엇이 말해지고 있는가’가 아니라 ‘누가 말하고 있는가’이기 때문이다. 산이 알피니즘이라는 이데올로기에 갇혀 있을 때 그 산을 오르는 인간은 영원히 부자유를 극복하지 못할 테다. 그 부자유는 언어가 만들어 내는 것이고 인간은 언어에 갇혀 산을 오르고 있지만 오르지 못하는 꼴이 될 것이다. 


삶의 중심을 삶 속에 두지 않고 오히려 피안에, 무에 옮겨 놓는다면 이는 실로 삶에서 그 중심을 박탈해 버리는 것이 된다. 마찬가지로 산을, 그 안에 무언가 있을 거라는 의식과 진리의 대상으로 삼는다면 침묵으로 일관하는 산에 영원히 접근하기 어렵다. 산은 이 세계와 무관하고, 산은 나와 무관하다. 나와 무관한 자리에 놓고 의식이 사라진 곳으로 간다면 그때 산은 제 몸을 보여줄 터인데 그때 알피니즘은 죽을 수밖에 없는 인간의 육체로, 오를 수밖에 없는 인간의 정신성을 찾아내는 것이 될 테고, 알피니스트는 스스로를 자유롭게 하는 것에 성공한 자들이 될 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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