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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장재용 Nov 16. 2021

마지막까지 길에 있으라

마지막까지 길에 있으라


죽어라 오른 산, 꼭대기엔 정상임을 알리는 표지판 밖에 없다. 책의 마지막은 마지막을 알리는 페이지 숫자만 있을 뿐이다. 착각해선 안 된다. 정상에 이르렀다고 해서 정상은 우리에게 커다란 선물을 덥석 안겨주지 않는다. 책을 끝까지 읽는 것과 산의 정상에 마침내 다다른 사태는 ‘기대’에 젖어 사는 인간의 대표적인 헛발질인지도 모른다. 


오르고, 읽고, 먹고, 싸는 동안 인간은 출생에서 죽음으로 나아가고 출생자 1과 사망자 1이라는 통계적 숫자사이에 가느다란 눈금은 우리의 기대다. 그 눈금에 서식하는, 혹시나 모를 ‘기대’에 기대어 기대하다 사라지는 우리 삶은 자연수가 아니다. 그것은 허수도 아니고 실수와 허수로 이루어진 복소수의 삶에 가깝다. 잡히지도 않고 보일까 말까 한다는 말이다. 


태어남, 죽음, 결혼과 헤어짐에 관해 1이 더해지거나 빠지게 되는 한 사람의 중요한 변곡점들은 덤덤하게 아무런 심장의 요동 없이 숫자로 표현되어 통계로 관리될 텐데, 삶에서 느끼게 되는 기대와 헛발질은 통틀어 1이 되고, 다다르고 굽어지고 꺾이는 인생 곡절의 끝에는 누구도 용서하지 않으리라는 표정으로 입관하는 내 할아버지 얼굴과 같을 테다. 


한번 삶을 염세적으로 보기 시작하면 그 경로徑路의존적인 삶의 양태에 무서움이 엄습한다. 죽을 때가 되면 죽고, 태어날 때가 되면 태어나며, 태어나고 살고 죽는 것이 우리가 보아오던 일요일 오전 지루한 텔레비전 프로그램처럼 꼭 그렇게 끝나고 시작되고 진행된다. 그 속에 인상을 쓰기도 하고 누군가와 박치기도 했다가 인색하게 굴고, 증오하며 분노하고 또 기뻐하기도 하고 행복해하기도 하는, 많은 무리 속 인간 중에 하나인 내가, 태어났으니 살고, 살았으므로 죽어야 한다는 사실이 받아들이기 버거울 때가 있는 것이다. 그 끝은 끝이므로 끝을 보고 싶지 않을 때 말이다.


다만 꼭대기에 이르는 길에는 그 험난함을 뚫어낸 상처와 흔적만은 남는다. 그 여정의 상처와 흉터가 사실은 정상이 수여한 훈장이다. 우리는 사실 길이 주는 흔적이다. 길이라는 것이 산에서는 산길이요, 책에서는 페이지 한 장, 한 장 읽어가는 것이라면 모든 길은 과정이고 재단하자면 우리는 우주가 저지르는 어떤 과정의 흔적에 지나지 않을 테지만, 살지 않으면 결코 받을 수 없고 경험할 수 없는 그 ‘흔적’은 오로지 묵묵하게 견딘 사람에게 삶이 수여하는 선물이다. 


열반에 이른 자는 열반에 머물 수 없다. 정상에 이른 자는 내려서야 옳다. 흔적과 흉터를 간직한 채. 내려서서 오르지 못한 자, 오름의 기쁨을 모르는 자, 오르는 과정을 경험하지 못한 사람이 되어 부디 정상엔 아무것도 없다고 말하는 사람이 되지 말자. 그 길을 걸어간 자와 그렇지 못한 사람은 다르다는 것, 정상을 향하는 사람의 존재 이유는 정상에 있지 않고 어쩌면 낮은 땅에 있다. 첨단을 지향하되 애둘러 가기를 두려워마라. 꼭대기를 오르되 내려서기를 멈추지 마라. 삶의 상처와 흉터를 사랑하는 자, 마지막까지 길에 있으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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