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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장재용 Mar 18. 2022

우울에서 벗어나는 한 가지 방법

우울에서 벗어나는 한 가지 방법


이제 예전처럼 다시 하늘 길이 열리는 것 같습니다. 실로 얼마만인지요. 어제 그리고 오늘, 한국에 계시는 지인 분들이 격리 기간이 사라지는 상황을 물어옵니다. 그 덕에 오랜만에 나의 사람들과 즐거운 대화를 나눴습니다. 출근 길, 차 안에서 문득 하늘을 올려봤는데 파란 바탕에 태극 문양의 비행기가 새초롬하게 지나 갑니다. 이내 무심하게 보던 책을 다시 들여다봤지만, 알 수 없는 미소가 지어졌습니다. 


어느 기관에서 팬데믹 전후의 삶을 비교한 보고서를 우연히 읽었습니다. 특정 기간에 살아간 사람들의 삶의 양태를 수많은 도표로 설명해 놓았는데 복잡한 인간의 삶을 도표와 수치로 설명하려 애쓰는 그들이 조금은 안쓰럽기도 했지만, 인내를 갖고 끝까지 읽어 내렸습니다. 보고서 설명에 따르면, 팬데믹 이후 사람들의 우울감은 높아지고 행복도와 삶의 만족도는 낮아졌다는 것이 주요 골자더군요. 사회가 아무리 잔인하게 굴러가더라도 사람은 서로 말을 섞고 감정을 나누는 관계 속에서 편안함을 느낄 텐데, 다른 모든 사회적 야만은 그대로인 채 관계만 쏙 사라졌으니 그 설명에 고개가 끄덕여집니다. 


상대적으로 소외받고 왜소해진 사람들은 서로에게 기대면서 위로 받고, 그나마 처지를 낙관할 수 있었습니다만 팬데믹 이후에 그런 안전장치들이 조금씩 떨어져 나갔던 게 아닐까 합니다. 그래서 조금은 야만적인 상황에 직면하게 된 거겠지요. 예를 들면 직접 만나서 감정을 교류하던 일은 영상으로 대체되고 수많은 미디어들의 화려한 모습과 자신보다 우월한 것 같은 삶의 방식만을 접하게 되면서 결국 비교중독이 문화적인 대중 조작의 형태로 팬데믹 기간 중에 바이러스만큼이나 활개를 쳤을 텝니다. 그러니 우울해질 수밖에 없습니다. 조금 더 이어가 보면, 친구 집의 평수를 듣고 온 아이가 ‘우리 집은 몇 평이야?’라는 말을 버젓이 하게 만드는 건 비교 중독 사회의 초기 증상입니다. 그 아이는 어른이 되어서도 ’비교본능’을 숨기며 살 순 없을 테니까요. 비교를 반복하며 자란 아이에게 온전한 개인의 가치와 그 개인들이 모인 공동체적 품위를 요구하긴 어렵습니다. 


한편 ‘그 아이’가 자라 어른이 된 게 지금의 내가 아닌가라는 생각에 미칩니다. 사유의 우월함이 아니라 외면의 우월함을 보게 된 경박한 어른이 된 건 아닌가 하고 말입니다. 제 보기엔 사람들은 서른 두 평짜리 아파트에 사는 사람은 스물 두 평짜리 아파트에 사는 사람보다 열 평이 우월하고, 마흔 두 평짜리 아파트에 사는 사람은 스물 두 평짜리 아파트에 사는 사람보다 스무 평이 우월하다고 여기는 마음이 엄연합니다. 일종의 병이지요, 암이 전이되듯 이 ‘아파트 병’은 자신보다 백 만원을 더 가진 사람은 백 만원만큼 자신보다 뛰어나다고 여기는 데까지 이릅니다. 그런 판단의 잣대를 갖고 사는 인간의 삶은 애처롭습니다. 그 병이 전이를 넘어 전염에 이르게 되면 비교의 스케일도 커져 GDP까지 비교하게 됩니다. 우리 내면에는 ‘GDP 인종주의’가 존재합니다. 그러니까 한국보다 GDP가 높은 나라의 이방인에게는 호의를 베풀지만, GDP가 낮은 나라의 사람들은 비하하고 차별하고 혐오하는 내면의 인종주의 말입니다. 베트남에 있으며 가슴팍에 콕 박히듯 그런 장면을 많이 봤습니다. 입 밖으론 내뱉지 않지만 머릿속에서는 확연한 ‘우리 보다 못 사는 나라’가 모두의 마음 속에는 엄연히 들어앉아 있습니다. 저도 한 가지 고백해야겠습니다. 길을 잘못 가고 있는 택시 기사님께 조금 기분 나쁘게 말한 적이 있습니다. 그 장면을 지켜본 아내로부터 저는 호되고 욕먹고 난 뒤 Racist 라는 모욕을 들었습니다. 반성합니다. 


그러니 비교는 자기 비하와 우울, 자살로 이어지거나 인간을 살해할 수도 있는 강력한 암세포입니다. 인종주의까지 뻗쳐 있는 예후가 나쁜 병입니다. 그것은 동기부여의 긍정적 발판이 아니라 단지 ‘손해와 이익의 냉철한 현금계산’으로 이어지는 마음의 병입니다. 이제 팬데믹은 지나갔으니 모두가 ‘비교’에서도 완전히 벗어났으면 좋겠습니다. 참고가 될 지 모르겠습니다만, 여기 제가 평소에 주로 써먹는 ‘비교와 우울에서 벗어나는 방법’ 한 가지를 소개합니다. 


지구 밖으로 잠시 다녀오세요. 비교에서 벗어나려면 내 주변에서 벌어지는 일들과 거리를 두는 연습이 필요합니다. 왜냐하면 일상은 하루도 빠지지 않고 “너를 초라하게 만들어 주겠어” 라는 메시지로 찾아오는 느끼한 스토커이기 때문입니다. 시선을 천천히 그리고 무한히 확장하여 우주로 데려갑니다. 그리고 지구를 Bird view로 봅니다. 우리 옆에 벌어지고 있는 일들은 먼지 덩어리에 불과하고, 둥둥 떠다니는 육지에서 일어나는 70억 ‘화학적 찌꺼기’들의 사사로운 일중에 하나 일뿐입니다. 이 시선으로 보면 우리에게 일어나는 모든 일들은 우연으로 환원됩니다. ‘우주의 관점에서 지구는 단지 하나의 특수한 사례’고 지구 관점에서 나는 동일한 인간류의 상이한 형태일 뿐이니 말이지요. 거대한 산악지괴가 융기하며 스스로 두터운 층을 파괴하고 두께 1,000미터의 외피를 들어 올리거나 찢는 일쯤은 아무것도 아닌 게 됩니다. 그리고 다시 여기, 지금의 나로 돌아옵니다. 조금 여유로워진 것 같습니다. 또 무엇이든 할 수 있을 것만 같습니다. 이 방법은 나의 유한함을 인식하여 무한으로 데려 가는 연습입니다. 평균성에 기대어 남들과 그리고 주변과의 불필요한 비교를 단절하는 연습입니다. 그리고 이것은 어떤 상상을 하더라도 이룰 수 있다는 자기가능성에 대한 최면이기도 합니다.


아무리 잘난 인간도 결국 인간일 수밖에 없습니다. 운명은 알록달록하고 삶은 늘 복잡하지만, 지구의 시간에 내 심장의 박동을 맞추면 비교와 불안, 두려움은 사라집니다. 두려움의 자리가 없으니 실패할 자리도 없습니다. 살다가 위험을 만나면 끼니 돌아오듯 전쟁을 치르고, 혹여 그 전쟁에서 다행히도 살았다면 살아 있는 것에 감사할 자리 외에는 없는 것이지요. 팬데믹의 끄트머리에 다다른 것 같습니다. 이제 세상으로부터 훼손되고, 서로를 비교하며 갈려져 나간 마음을 다잡으며, 당신이 더는 우울하지 않기를 바랍니다. 그리고 힘든 시간, 고생스러웠던 기간을 끝까지 견뎌낸 당신의 등줄기를 어루만지며 박수 칩니다. 고생하셨습니다, 짝짝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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