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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장재용 Mar 08. 2022

전설의 Bad boy ‘주영’

전설의 Bad boy ‘주영’

미국 서부에 위치한 요세미티 국립공원은 거벽을 등반하는 산악인들의 메카다. 19세기 후반 유럽 알프스 봉우리들이 인간의 발길을 허락하며 등정된 이후 1950년대부터 산악인들은 히말라야 8,000m 이상 거봉巨峯에 눈길을 돌렸다. 1970년대까지 히말라야 봉우리들의 대부분이 등정되던 그 시기, 새로운 등반 스타일이 등장한다. 이른바 ‘거벽 등반’이다. 요세미티 국립공원은 우리나라 경기도만 한 면적이다. 그 곳에는 63빌딩 다섯 채를 수직으로 쌓아올린 1,000m 이상의 암벽이 즐비하다. 그 바위들은 여러 개의 바위들이 합쳐 진 게 아니라 단 하나의 바위가 그렇게 솟아 있다. 바위꾼들은 그 숨막히는 수직의 암벽을 그냥 두고 넘어갈 수 없었다. 요세미티에서 대암벽 등반, 거벽 등반이라 불리는 등반 사조가 처음 생겨난다. 


1970년대 미국의 내로라하는 세계적인 등반가들이 그 거대한 암벽을 오르려 혈안이 됐을 때, 조그만 동양인 청년이 그들 사이에 있었다. 난다긴다 하는 그들을 밀쳐내고 보기 좋게 거벽을 올라버린다. 그의 이름은 ‘주영’이다. 한국 거벽 등반사의 아버지로 불린다. 1979년 한국인 최초로 요세미티 거벽 하프돔 북서벽, 엘 캐피턴의 노즈를 등반하고, 아이거북벽, 파키스탄 카라코람 산맥의 바위 산 트랑고타워(6,286m)를 한국인 최초로 올랐다. 그러나, 그는 시대를 너무 앞서갔다. 암벽등반이라는 단어도 없었던 시절, 이미 거벽과 대암벽 등반을 섭렵했으니, 당시 그의 등반은 너무나도 선진적이었던 것이다. 한국의 산악계는 그의 전위적인 등반을 거짓말이라 했고, 그의 지인들조차 믿을 수 없다는 사람들이 대부분이었다. 그때 그의 대처는 ‘주영’다운 것이었다. 그는 세계로 눈 돌리지 못하는 좁은 산악계를 불평하는 대신, 조용히 다시 오르는 방법을 택한다. 불신을 불식시키려 자신이 올랐던 거벽을 몇 번이고 다시 올라 자신의 등정을 증명했다. 내친김에 그는 당시 전 세계적으로 유례를 찾기 힘든 경이적인 등반을 해내는데, 겨울 요세미티에 꽁꽁 얼어 있는 150m 고난도 수직의 빙벽을 로프와 안전장치 없이 프리 솔로 개념으로 올라버렸던 것이다. 직등으로 오른 것도 모자라 마지막 오버행 구간에서는 좌우로 트래버스를 해가며 마치 빙벽을 자유자재로 춤추듯 올랐다는 사실에 미국 등반계는 경악했다. 미국의 클라이머들이 혀를 내두르며 인터뷰를 했는데 당시 그의 대답이 걸작이다. 


“나는 당시 실연의 상처가 아물지 않아 삶에 미련이 없었고 솔로 등반에 전혀 부담이 없었다” -주영-


한국인 최초로 에베레스트에 오른 故고상돈의 북미최고봉 알래스카 맥킨리(6,194m, 현재는 데날리Denali 라는 이름으로 변경) 등반에서 그의 곁을 지켰으며 히말라야와 유럽 알프스, 알래스카와 미국의 거벽을 쓸고 다녔던 그는 지금 베트남 호찌민에 있다. 그가 이곳에 있다는 지인의 말에 나는 깜짝 놀랐다. 그가 나를 만나고 싶어 하든 말든, 좋든 싫든 버선발로 달려가 덥석 그의 손을 붙잡았다. 아, 다시 놀라워라, 내 젊은 시절 영웅이었던 Bad boy를 실제로 만난다는 사실에 눈치도 염치도 모두 방구석에 던져 놓고 며칠을 나는 설렜다. 그렇게 만난, 벌써 일흔을 바라보는 그는 천진할 정도로 유쾌했다. 서른 살을 훌쩍 넘는 나이 차이에 나는 왜 그를 친구 같다 생각했는가, 산악인 특유의 무겁고 진지하며 다소 비장하리라 생각했던 내 생각은 완전히 착오였음을 확인하는 건 1분이면 족했다. 그가 들려준 히피적 악동 산악인의 이야기에 나는 흥분을 감출 수 없었다. 누군가 그에게 ‘주영에게 알피니즘이란 무엇이냐?’고 물었던 적이 있었다. 그의 대답을 전해 들은 나는 무릎을 세게 쳤다. 그의 말은 모든 등반 이념들을 판단 정지시켰고 등반에 관한 무수한 철학들을 일순간 무너뜨렸다. 


“알피니즘? 그런 거 없어요. 믿지도 않고요. 등산이라는 게 본질적으로 노는 거 아닙니까? 노는 데 무슨 이념이 있습니까? 즐거우면 됐지요!” -주영-


수많은 철학자들이 인간의 본성을 연구하고 또 알고 싶어한다. 철학자 비트겐슈타인은 자신의 삶을 극한까지 밀어 넣기 위해 성하지 않은 몸으로 1차세계대전에 참전하기도 했다. 인간의 본성은 책상 앞에서 보려 하면 보이지 않고 삶을 극한까지 밀고 나간 곳에서만 보이는 건 확실한 것 같다. 한 발짝 때기도 힘든데 같이 간 후배가 탈진하거나, 같이 끈을 묶은 상황에서 동료가 추락하거나, 추위에 사지가 떨어져 나갈 것 같지만 이미 동상에 걸린 후배에게 장갑을 줘야 하는지를 갈등할 때, 수많은 경우와 시시각각의 상황에서 인간의 본성이 자기도 모르게 튀어나오는 인문학 연구의 보고寶庫가 산이다. 인문학은 삶과 죽음을 연구한다. 극한의 산과 거벽은 가장 치열한 도전의 장場이지만 죽음이 가장 흔한 곳이기도 하다. 어제 나와 함께 웃던 동료가 오늘 주검이 되어 내 앞에 있는가 하면, 뱃가죽이 등에 붙어 밥 먹을 때마다 서로 아귀가 되는 곳에서 자기 밥을 덜어 후배 그릇에 퍼주는 선배가 있다. 살고 죽는 것이 누구에게나 평등하게 닥치고 누구도 엄습하는 죽음을 받아들여야 하는 곳이다. 아침에 먹은 끼니처럼 죽음도 그렇게 가볍게 올 수도 있다는 사실이 충만한 곳. 코펠밥 먹는 사이는 그래서 베갯사이 같은 이불 덮고 자는 사이보다 무섭다 하지 않던가. 그 앞에서는 알피니즘조차 죽음처럼 가벼운 것이라면 도대체 얼마나 많은 삶과 죽음의 경계를 무시로 넘나들었던 말인가. 


화려한 경력이지만 그의 등반 스토리는 눈물없이 들을 수 없다. 요세미티 국립공원에서 살다시피 했던 1970년 후반 당시 그는 춥고 배고팠다. 캠프장 사용료가 없어 쓰레기를 주웠고, 먹을 게 없어 카페테리아에 숨어 들어가 관광객들이 남긴 음식을 주워 먹기도 했다. 일본 관광객들이 음식을 가장 많이 남겼었다고 얼굴이 무너지듯 웃으며 그는 말했다. 쓰레기를 뒤져 알루미늄 캔을 주워 개당 5센트씩 받아가며 연명했다고 한다. 그는 요세미티 등반부랑아 climbing bum의 원조였지만, 그의 등반은 대한민국 등반사의 획을 긋는 창조적인 것이었으니 Bad boy는 이때 탄생한 ‘주영’신드롬이었다. 그가 쓴 자서전 ‘얄개바위’는 한때 한국 산악계에서 선풍적인 바람을 불러일으킨 ‘Bad boy’들의 입문서였다. 허락을 얻어야 하지만, 미래의 Bad boy들을 위해 주영의 ‘얄개바위’ 서문 일부를 인용한다. 


“나는 bad boy 라는 단어를 사랑한다. Good boy들이 들판으로 놀러 갈 때 bad boy들은 험한 산을 자일을 묶고 오른다. Good boy들이 싸이클을 타고 아스팔트 위를 달릴 때 bad boy들은 산악자전거를 타고 험한 산길을 데굴데굴 굴러서 내려온다. Good boy들이 수영을 하고 조종경기를 할 때 bad boy들은 스쿠버를 하고 카약이나 래프팅으로 험한 물길을 헤집고 다닌다. Good boy들이 스키를 우아하게 타고 내려갈 때 bad boy들은 스노우 보드를 타고 하프 파이프에서 곤두박질 치고 있다. Good boy들은 어머니가 하지말라는 위험한 짓은 하지 않는다. 그러나 Bad boy들은 어머니가 하지말라는 짓은 모조리 하고 다닌다. 나는 암벽에서 추락하여 병원에 입원도 하고, 맥킨리 원정 때 고상돈 대장을 잃었으며, 산악자전거 사고로 이 잘생긴 얼굴을 꿰맸고 스노우 보드를 타다 기절도 해보았다. 물에 빠져 익사할 뻔한 적이 몇 번이었는지 기억할 수도 없다. 그래도 나는 내 몸속에 좋은 피라곤 한방울도 안 넣으시고 나쁜 피로만 가득 채워 주신 하느님께 너무나 감사하고 있다. 이글을 읽고 있는 여러분들도 자신은 못 느끼겠지만, 몸 속에 나쁜 피가 요동치고 있을 것이다. 더 이상 good boy인척하지 말고, 산과 물 속으로 뛰어나가 보아라. 위험을 감당할 자신이 없으면 집 안에 처박혀 컴퓨터 게임이나 하고 살아라. 그러나 몸 속에 주체할 수 없이 끓어오르는 나쁜 피가 있다면 정열을 모조리 자연과의 도전에 쏟아 부어 자연과 일체가 되어라. 그러면 당신은 진정한 bad boy가 되리라. 내 자식만큼은 철저한 bad boy로 기르고 싶다. 그것이 나를 bad boy로 만드신 아버님께 보답하는 길이라 생각하고 죽는 날까지 bad boy로 살 것이다.” -주영-


프랑스 철학자 들뢰즈는 ‘우리는 나였을 나를 너무 빨리 포기한다, 우리는 나였을 나를 만날 수 있었을텐데 결국 못 만나고 죽는다’는 이해할 수 없는 말한 적이 있다. 그는 우리가 자기 자신을 만나지 못하고 죽는 이유가 수많은 세상의 율법과 제약 때문이라고 덧붙였는데 자신을 한계지우는 세상의 시선과 율법을 서둘러 수용하고 나 자신이 아닌 ‘세상의 나’로 살다 죽는다는 것이다. 그러면서 들뢰즈는 니체의 ‘초인’은 먼 별의 우주적 개념이 아니라 ‘나를 만난 나’ 그러니까 멘쉬, 인간인 나 자신 안에 나를 찾아 넘어서는 사람, 위버멘쉬가 곧 초인이라 설명한다. 주영은 자신을 만난 적이 있다. 아니 그는 그 자신을 만나 이미 위버멘쉬의 그로 살고 있다. 그가 말하는 Bad boy는 우리 안에 있는 위버멘쉬다. 나는 그에게서 세상의 가치를 뒤엎으라 호통치는 니체를 본다.


“몸이 허락하지 못해 바위를 오르지 못하면 스스로 인정할 수밖에 없겠지만, 그저 하기 싫은 마음이 들어 바위를 오르지 않게 된다면 그때 나는 살아도 죽은 거야” -주영-


그는 알피니즘은 없다고 말했지만, 나는 ‘주영’에서 알피니즘 사건을 본다. 알피니즘이 인칭대명사라면, 그러니까 알피니즘이라는 게 있어서 그 자신의 모습을 인격화해서 인간의 모습으로 드러낸다면 나는 알피니즘이라는 알쏭달쏭한 것이 ‘주영’이라는 옷을 입고 나타났다고 믿는다. 아이러니하게도 알피니즘은 개뿔이라며 넉살 좋게 웃는 그를 통해 나는 충격적인 알피니즘 사건을 겪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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