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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장재용 Oct 27. 2022

아, 가을인가

아, 가을인가

 

아침, 빵 두 조각을 데워 먹는다. 마른 빵은 목구멍을 넘어가길 힘들어하고 마찬가지로 매일 반복하는 일상은 힘겹다. 생활이라는 말을 간혹 입에 담지만, 그 말이 얼마나 징글징글한 말인지를 깨닫는 데는 긴 시간이 필요하진 않았다. 산다, 는 말이 대체 뭘까를 묻는 사이 해는 저물고 어느덧 우기가 끝났다. 야속하다. 누가 야속한지 무엇이 야속한지도 모르는데도 무시로 달려드는 ‘생활’에 대한 책임회피는 속수무책의 불안 때문일 게다. 그 새 가을이 왔다. 고개를 숙였는데 숙였던 고개를 드니 가을인 것이다. 이 황망함, 세월은 문 틈 사이로 고양이 한 마리 지나간 찰나다. 


글을 쓰는 것은 나의 내면을 남에게 내보이고 또 전달하는 일이다. 정신적 나체를 드러내는 것이니, 많은 용기가 필요한 일이다. 나는 글을 쓰다가 내가 배짱과 용기가 없다는 걸 자주 느낀다. 내가 쓰고 싶었으나 쓰지 못했던 글들이 종종 나를 괴롭게 만드는데, 가을에 관해 쓰는 일이 그렇다. 


가을에 관해 쓰려 하면 먹먹한 가슴을 붙들고 한참을 멍 때리다, 키보드에 손을 얹었다, 뗐다를 반복하다, 고개를 수그리고 마당을 돌다, 돌아와 다시 앉은 책상에서 마침내 쓰기를 포기하게 된다. 차라리 지금 여기가 한국이고, 가을이었다면, 가을이 내 앞에 와 있으니 덜 그리웠을 테고 그저 손이 ‘가을이다’하며 저절로 써내려 갔을 터인데, 계절 없는 베트남에서 문득 떠오른 가을은 외려 난망하고 난감하다. 그리움은 가을이 되고, 가을은 그리움이 된다지만, 간밤에 쓴 글을 아침에 읽는 것 마냥 센치해진 글을 경계해야 하니 글은 자꾸 걸리고 넘어진다. 가을이 아니라서 가을에 대해 쓰지 못하겠다는 말인가, 내 스스로 반문하며 괜한 반항심이 들어 이제는 쓰지 않을 수도 없다. 어쨌든 내 고향에 가을이 왔으니 나는 가을에 관해 쓴다. 그래, 상황을 핑계로 삼고 처지에 양보한 놈치고 제대로 된 글을 남긴 적이 없었지. 대작가들은 삶의 고비에서 늘 먼저 썼다 하지 않았는가, 손톱의 때라도 닮아가려면 이제 쓰자, 고 마음먹는다. 보았는가, 가을은 이토록 쓰기가 힘든 것이었다. 


북반구 계절 기준으로는 비 오는 여름과 비가 오지 않는 여름만 있을 뿐인 이곳에서 가을은 마음으로 느낄 수밖에 없다. 언제였던가, 딸래미 손을 잡고 겨울왕국 2편이 개봉됐다길래 끌려가듯 봤던 적이 있다. 무더운 베트남에서 겨울을 한번 볼까하고 갔더니 영화에선 겨울은 없고 찬란한 가을이 스크린을 물들이고 있었는데, 영화 내용은 잊고 문득 가을 설악의 핏빛 절경을 당장 볼 수 없다는 생각에 영화를 보는 내내 가슴 아팠던 기억이 있다. 내 조국의 가을이 내 마음에 박혔던 모양이다. 가을을, 아무렇지 않게 그저 왔다 가는 계절로만 여기던 나를 원망했는데, 계절 없는 곳에서 늦게나마 깨닫게 되니 다행이라 여긴다. 결핍이 인간을 만든다. 


늦가을, 설악산 등반을 마치고 힘이 바짝 들어간 허벅지를 터덜거리며 내려온다. 무거운 배낭, 넘어지지 않으려 땅만 보고 걸었더니 고개가 아파온다. 잠시 서서 머리를 들었더니, 늦가을 낙엽은 비처럼 떨어지고 있었다. 그때 봉정암 하산 길은 지상이라 하기엔 비현실적인 아름다움이었다. 설악뿐이던가, 해인사 저녁 법회에서 스님들이 반야심경을 소리껏 독송한다. 이 시대 마지막 남은 남성 중창단의 중후한 합창이다. 차가운 가을 저녁의 바람이 허파 가득 채워진다. 바람과 마음의 양식을 가슴에 담고 내려오면, 대적광전 밑 감로수에 하강하는 가을 낙엽 하나가 툭 던지는 한마디, 세상은 모두 순간이라고. 세속으로 넘어오자. 가을은 야구다. 가을 야구, 가을이라는 단어에 자연스럽게 따라오는 두 글자는 야구다. 만고 내 생각이다. 지난 날, 자이언츠의 가을 야구를 동남아 열대 무더위에 뜨거운 가슴으로 봤던 기억이 있으므로 올해, 자이언츠의 가을 야구 진출이 무산된 건 울고 불며 야구에 빠져들 나를 위해 잠시 쉬어 가라는 뭉클한 배려라 생각하자. 웬 야구? 설악과 해인사에 이은 가을 상념이 뜬금없다. 어쩌겠는가, 글 판 잡은 필자의 짧은 상상을 원망할 밖에, 가을하면 떠오르는 빈약한 내 뉴런을 한탄할 밖에. 


‘작은 지혜는 큰 지혜에 미치지 못하고 짧은 동안 사는 자는 오래 사는 자에 미치지 못한다. 아침 버섯은 아침과 저녁을 알지 못한다. 쓰르라미는 봄과 가을을 알지 못한다. 이것들은 짧은 동안 사는 것들이다. 초나라 남쪽에 명령이란 나무가 있는데 오백 년을 한 봄으로 삼고 오백 년을 가을로 삼는다고 한다. 태고적에 대춘이란 나무가 있었는데 팔천 년을 한 봄으로 삼고 팔천 년을 한 가을로 삼았다고 한다.’ 장자의 말이다. 장주는 긴 시간의 계절을 말하려던 것이 아니었다. 가을이 오기 전 죽는 쓰르라미와 수만 년을 사는 대춘 나무를 빗대어 시간 너머를 생각하려는 일종의 사유 기획이었다. 푸르던 것들이 시드는 가을은, 시간 안에 존재하며 시간 너머를 사유할 수 있는 가장 좋은 계절이다. 그러고보니, 계절 없는 열대의 나라에서 꽤 오랜 기간 살고 있다는 걸 문득 알게 된다. 기억을 거슬러 오르니 내가 한국을 떠나던 날은 미켈란젤로의 그림 같은 구름이 새하얗던 가을 날이었다. 언젠가 고향의 가을을 오랜 연인처럼 만날 날을 나는 고대한다. 그렇다, 나는 가을을 그리워하고 가을에 목메고 볼 수 없어 보고 싶어하고 보고 있어도 보고 싶어하니, 가을과 연애하고 있었다 해도 과언은 아니겠다.


내 살아 있는 어느 날 어느 길 어느 골목에서 

너를 만날지 모르고 만나도 내 눈길을 너는 피할 테지만 

그날, 기울던 햇살, 감긴 눈, 긴 속눈썹, 벌어진 입술, 

캄캄하게 낙엽 구르는 소리, 나는 듣는다 


-이성복, ‘연애에 대하여’ 중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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