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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장재용 Feb 20. 2024

길이면 가지 않는다 (앨버트 머메리)

출간 후 연재 '알피니스트' - 2

여기 하나의 선언이 있다. 말이 지닌 파괴력은 강력해서 한 인간을 순식간에, 화염에 휩싸이게 한다. 생을 걸어 치열하게 산 삶 하나가 마지막으로 토해내는 진실의 말, 그 선언에 우리는 사로잡힌다. 삶을 송두리째 걸어 본 사람이 하는 말에 사람들은 기꺼이 자기 운명을 내맡긴다. 한번 소용돌이에 빨려들면 스스로 감당할 수 없을 만큼 무섭게 돌진한다.


하나의 강렬한 선언 이후 일련의 사유들은 그 선언의 각주가 되거나 그 아래로 포섭된다. 그런 말들은 언제나 다른 말을 태어나게 하는 힘이 있어서, 한 사람이 세계와 맞버티는 힘의 진공상태에서 잉태된다. 그 말이 나오지 않으면 안되는 공허, 선언이 태어나지 않을 수 없는 사회적 상황, 수많은 말들이 무한으로 무너져 집약된 밀도가 역사적으로 응축된다. 선언의 폭발력은 힘이 응축된 시간과 비례한다. 먼 옛날 이 세계가 삼천대천세계의 시간을 무한의 진공으로 응축한 뒤 폭발했듯.


19세기 유럽의 산악계는 더는 오를 곳 없는 무한의 ‘정복’으로 한껏 추어올려졌다. 알프스 봉우리 꼭대기마다
‘정복’의 욕망이 펄럭였다. 1865년, 마지막 난제亂題로 남아있던 마터호른Matterhorn(4,478미터)▲이 에드워드 윔퍼 Edward Whymper라는 런던 출신의 사내에 의해 등정됨으로써 인간이 오를 수 없는 산은 더는 없다고 사람들은 믿었다. 기록에 따르면 1854년 알프레도 윌스Alfred Wills가 베터호른 Wetterhorn(3,708미터)을 등정한 이후부터 1865년 에드워드 윔퍼가 마터호른을 초등初登한 시기까지의 10년간, 유럽 알프스에 솟아있는 4,000미터 이상의 봉우리 70개를 포함한 크고 작은 149개의 봉우리가 초등되었다. 


그러나 끝까지 올라간 축포는 힘을 다하고 한쪽으로 무너지고 있었다. 1854년 이후 10여 년간 쉼 없이 계속되던 알프스 고봉들의 등정 레이스, 이른바 알프스 황금시대는 이제 더는 오를 산이 없게 되자 그 막을 내리려 하고 있었다. 인간에 의해 죄다 ‘정복’된 뒤 정상은 의미를 상실했다. 오르는 자들은 더 오를 곳이 없어진 세계에서 무의미와 공허 속에 방향을 잡지 못했다. 어쩌면 곧 도래할 한 사내의 선언에 또 다른 폭발을 예비하고 있었을지 모른다. 머메리의 출현이 시대와 역사적으로 무르익었기 때문이다. 머메리가 산악사山岳史에서 중요한 이유는 그의 선언으로 진정한 의미의 오르는 자, ‘등반가’ 집단이 생겨났기 때문이다. 등반가들의 삶의 형태와 의지의 방향은 머메리 이전과 이후로 나뉜다. 오르는 자들의 꿈은 그에게 흘러가 고였고 다시 그로부터 흘러 나간다. 앨버트 프레데릭 머메리, 산악인의 꿈이 모여들고 나간 커다란 웅덩이이다.


혜성같이 나타난 머메리는 시대에게 이렇게 말했다. 오를 수 있는 산은 아직 남았다, 당신들의 길로 가지 않는다면.


“알프스 봉우리들을 다 올랐는가? 그건 당신들 말이다. 나는 당신들이 이미 갔던 길이라면 가지 않는다. 다른
길로 모든 봉우리를 다시 오를 것이다. 정상에 오르기만 하면 끝났다고 생각하는가? 나는 당신들과는 다른 방
식, 더 어렵고 다양한 루트로 오른다.” - 앨버트 머메리, 《알프스에서 카프카스로》


‘더 어렵고 다양한 길More Difficult Variation Route’은 이후 산악계의 신앙이 된다. 이 문장은 오늘날에도 여전히 일종의 산악인 입문 선서와 같은 율법이다. 어디를 올랐느냐가 아니라 어떻게 올랐느냐가 중요해진 것이다. 관점을 뒤바꾸는 산악계의 코페르니쿠스적 대전환이었다. 다시 마터호른 정상에 최초로 인류의 발자국이 찍혔던 때로 돌아가보자. 


당시의 마터호른은 1950년대의 에베레스트와 맞먹는 경합의 봉우리였다. 호방한 삼각뿔, 찬란하게 고립되어 뻗어간 피라미드의 날카롭고도 아름답게 휘어진 예봉銳鋒, 주위 4킬로미터에 걸친 알프스의 다른 산들이 그에게 몸을 낮추어 엎드린다. 난다 긴다 하는 산악인들이 죽음의 출사표를 던지며 도전했다. 하늘에 버틴 봉우리, 허공은 그의 것이었는데 인간은 그를 넘어서려 했고 마침내, 에드워드 윔퍼라는 영국 사내가 많은 사상자를 낸 끝에 마터호른 꼭대기를 피로 오른다. 한바탕 환호성이 지나간 자리, 그러나 얼마 지나지 않아 에드워드 윔퍼가 오른 훼른리 루트로 마터호른을 오르는 일은 더는 큰 영예가 되지 못한다. 누구도 갈 수 없다 여겨진 마터호른 북벽의 난코스, 츠무트Zmutt 능선으로 머메리가 오른 이후 사람들의 질문은 ‘어떤 루트로 올랐나’로 바뀌었기 때문이다. 뻔한 길을 가면서 품는 작은 희망 같은 건 적어도 머메리에겐 ‘벽 위에 처바른 변 자국 같은 것’이었다. 그는 다른 길과 새로운 길, 길 아닌 길로 길을 뚫으며 걸어간 첫 번째 사람이었다.


머메리가 남긴 유일한 저서, 《알프스에서 카프카스로》에는 그의 초등 기록, 개척 등반의 기록이 난무한다. 가이드 없는 산행, 무인지경無人之境의 루트 개척은 그의 철칙이었다. 무엇보다 등반 중에 안전을 책임지는 확보물인 아이스 피톤조차 단 한 번도 사용한 적 없다는 사실이 경악스럽다. 비록 마터호른 초등의 기회는 놓쳤지만, 마터호른으로 오르는 나머지 두 개의 루트, 츠무트 릿지와 푸르겐 릿지는 모두 머메리에 의해 초등되었다. 


머메리는 최후까지 머메리다웠다. 그는 인류 최초로 히말라야 8,000미터급 정상에 도전한 인간이다. 그는 서른아홉이던 1895년, 히말라야라는 곳이 존재하는지도 알지 못했던 때, 지도는 물론 이렇다 할 장비도 없이 낭가파르바트 Nanga Parbat(8,126미터)를 오른다. 전인미답의 봉우리는 아직 인간을 허락할 준비가 되어 있지 않았던 모양이다. 두 번의 등정 시도가 수포로 돌아갔고 세 번째 시도를 위해 이전과 다른 새로운 루트를 찾아 떠난 이후 그는 돌아오지 못했다. 인류의 히말라야 8,000미터급 등반의 첫 시도이자 첫 희생자로 운명을 마감했다. 아이러니하게도 그의 책 마지막 문구는 마치 그의 마지막을 예견한 듯하다. ‘등산가는 자신이 숙명적인 희생자가 되리라는 것을 알면서도 산에 대한 숭앙을 버리지 못한다’ 이 말은 또 얼마나 많은 젊은 산악인의 마음에 불기둥을 질렀던가.


그는 등반에 적당한 신체를 가진 사람은 아니었던 것 같다. 오히려 결핍 덩어리였다는 게 동료들의 평가였다. ‘키는 크고 허수아비처럼 여윈 체구에 어깨는 척추가 어떻게 잘못된 듯 구부정한 모습, 가장 최악은 너무나 근시여서 앞을 더듬거리거나 쉬운 빙하에서조차 미끄러질 정도’인 사내. 그런 머메리가 기라성 같은 알프스 황금시대를 무너뜨린 장본인이었다. 


18세기, 칸트는 순수이성비판을 발표했다. 저 획기적인 철학서의 발간 직후, 이제껏 신은 완전하다는 명제 위에 쌓아 올려 진 모든 철학은 붕괴한다. 칸트는 그의 첫 저작으로 그리스 자연철학, 플라톤, 아리스토텔레스, 스토아, 중세가톨릭에 이르는 도저한 형이상학의 서사를 은밀하게 무너뜨렸다. 단언을 피하지만, 인간의 믿음 체계를 한순간에 묻어버리며 신을 죽인 칸트보다 무서운 철학자는 없다. 이때까지 인간이 안다고 믿었던 사태에 대해 그것은 신앙 고백의 믿음일 뿐이며 계몽철학적 관점에서 죄다 허상임을 밝혔기 때문이다.


글이 샜지만, 철학사의 칸트가 지닌 파괴력을 등반사에 포개면 정확하게 머메리가 겹친다. 산을 오르는 가장 안전한 길, 쉬운 길을 고집하며 정상 등정에 초점이 맞추어진 머메리 이전의 등반 방식은 머메리에 이르러 모두 무너진다. 등정이라는 단조롭고 평평하던 등반 세계는 이제 ‘루트’라는 울퉁불퉁한 세계로 진입했다. 머메리 이후의 등반사는 모두 ‘길 아닌 길’로 간 사람들의 얘기로 풍성해진다. 어쩌면 오늘 산을 오르는 알피니스트들은 죄다 머메리의 자기장磁氣場안에 머무는 지도 모른다.


조금 더 확장하면, 머메리의 위대함은 가치 전도顚倒에 있다. 당시 지배적이었던 단순한 ‘정상 정복’이라는 가치의 무가치함을 그는 간파했다. 누군가 걸어간 길을 부러워하지 않았고 오히려 그것은 굴욕의 길이라며 부끄러워했다. 세상이 가치 있게 생각하는 건 그에게는 가치 없는 것이었다. 다수가 도덕률이라 생각하는 가치를 자신의 가치표에서는 과감하게 빼버린 것이다. 정상이라는 이름에 들러붙은 지배적인 생각, 그 시대 사람들 대부분이 상식이라 여기는 길을 거부하며 가치 전복의 최적 장소로 ‘산’을 택한 머메리. 그는 자신의 육근으로
관절과 전완근을 움직이고 사지를 비틀어 위험과 추락과 죽음에 대항하며 세상에 ‘가치 전도라는 가치’를 육화하여 말한다.


‘길이라면 가지 마라’


그의 붉은 문장은 여전히 유효하다. 알파벳 W로 시작하는 난삽한 의문Why이 아니라 H로 시작하는 유일하고 명징한 질문How으로 삶을 살아가는 방식의 전환을 요구한다. 이 세계의 무의미에 대항하는 인간의 질문이다. 이 세계에 의미가 있는지 없는지 알 수 없다. 그러나 의미를 모르고 죽을 순 없다. 모든 인간은 죽는다는 허무주의적 필멸론으로는 세계의 무의미에 대항할 수 없다. 철저하게 현실에 달라붙어 허무주의와 싸울 수밖에 없다. 이름을 남긴다고 해서, 역사적 사건의 주인공이 된다고 해서, 많은 사람의 기억에 굳센 신념의 사람으로 기억된다고 해서 잘 살았다는 타이틀을 수여할 수는 없는 일이다. 두꺼운 삶은 결국 자기 경멸을 거친 자기 극복에 있다. 그것은 중앙아시아 넓은 들판에서 기어코 사라질 소리를 내지르는 일과 다르지 않을 테다.

길이라면 가지 마라, 나는 머메리에게서 배운다. 자기만의 가치 표, 자기 자신이 주인인 삶, ‘자기가 확실한 느낌으로 모든 일의 주체가 되었을 때 즐거움은 솟아난다. 자기가 모든 일의 주체가 된다는 것, 모든 동사의 주어가 된다는 것’에 동감하며 그 동사의 주어 곳곳에 나를 참여시켜 즐거워하는 수밖에.


머메리, 자신이라는 세계를 원 없이 살다 간 사나이, 지구가 생긴 이래 아무도 내딛지 못한 땅에 첫발을 내딛는 인간의 행복을 상상한다. 혹시라도 알피니즘이라는 게 있어 그것이 인간으로 현현한다면 그것은 머메리일 것이다. 확실한 것은 거벽을 오르는 알피니스트건 뒷산을 오르는 일반인이건 자신이 삶의 주인인 한, 우리는 모두 새로운 길, 없는 길을 가는 머메리의 적자嫡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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