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이스와 수영의 6월 16일
이 글을 쓰고 있는 오늘은 6월 16일이다. 나에게 매년 이날은 두 사내를 함께 떠올리게 되는 묘한 인연의 날인데 오늘, 월급쟁이 서사를 잠시 덮고 이날의 두 사내에 관해 쓴다. 한 명은 아일랜드 소설가 제임스 조이스 James Joyce다. 1922년 발표된 그의 대표작 중 하나인 소설 율리시즈 Ulysses의 시간적 배경이 된 날이 1904년의 6월 16일이다. 1,200페이지가 넘는 방대한 분량을 자랑하는 이 소설이 출간된 날은 1922년 6월 16일이다. 제임스 조이스에게 이날은 의도적이었으니 그가 사랑했던 아내 노라 바네클 Nora Barnacle과 첫 데이트 했던 날을 기억하기 위해 6월 16일을 그의 소설에 남겨둔 것이다.
제임스 조이스의 ‘율리시즈’를 읽으려고 시도했다는 것은 그 자체만으로도 높이 평가해야 한다. 그것은 하나의 지적 모험이며 정신적 고통과 괴로움을 감수하겠다는 결연한 의지와 같다. 텍스트를 읽고 행간의 의미를 찾아가며 재미있으면 그만이고 재미없으면 안 읽으면 됐었던 ‘소설’에 대한 생각은 ‘율리시즈’ 앞에서 여지없이 무너진다. 그 난해함과 함축, 함의, 생략, 은유, 간접 언급 등은 머리를 쥐어뜯게 만들고 언어를 자유자재로 사용하는 유희 수준의 글, 외설과 은유 예술을 오가는 줄타기, 부도덕과 비관, 퇴폐적 이야기 속의 함의를 읽어내야 하는 의무는 책을 읽다가도 밀쳐내게 만든다. 제임스 조이스는 이를 알았는지 비아냥거리며 독자들에게 하는 말이 기가 막힌다.
‘나는 율리시스 속에 굉장히 많은 수수께끼와 퀴즈를 감추어 두었기에 앞으로 수 세기 동안 대학교수들은 내가 뜻하는 바를 거론하기에 분주할 것이다. 이것이 자신의 불멸을 보장하는 유일한 길이다.’
이 말은 나에게 그의 다른 소설 ‘젊은 날의 초상’에 나오는 한 구절을 떠올리게 하는데, ”예술가는 창조의 신처럼 자기가 만드는 작품의 내면이나 이면 혹은 그 위나 초월적인 곳에 남아서 남의 눈에 띄지 않은 채 스스로를 순화하여 사라지게 한 후 초연히 손톱이나 깎고 있는 거야. 손톱까지도 순화해서 없어지게 하고 있겠지.” 예술가의 욕망은 거대해서 자기 세계를 통해 현실 세계를 집어 삼키려는 조이스의 예술적 욕망을 읽곤 한다. 나를 한번 알아맞혀 보라며 세상에게 던지는 가장 난해한 퀴즈다. 그래, 예술은 이래야 한다.
아일랜드인들은 지구를 통째로 줘도 그와 바꾸지 않는다고 말한다. 그러나 그는 평생 가난하게 살았다. 사랑하는 딸의 정신질환으로 그는 늘 우울했다. 인세로 번 돈은 딸의 정신병 치료에 고스란히 쓰였다. 술을 거르는 날이 없었다. 중독 수준의 술로 인해 그의 아내는 두 번씩이나 그에게서 떠났지만, 그의 아내는 이 무력한 광인을 사랑했으므로 그때마다 다시 돌아왔다. 술병이 눈으로 옮겨붙어 안과 수술을 여섯 번이나 했으며 한동안은 장님으로 살았다. 삶이 그를 괴롭히는 중에도 창작욕에 불타 온전히 그 자신을 모두 태웠던 그가 나는 부럽다. 신과 맞붙어 살가죽이 모두 벗겨져도 웃고 있는 마르시아스처럼.
나는 개인적으로 그의 소설 ‘젊은 예술가의 초상’을 좋아한다. 그중에서 좋아하는 글은 주인공 스티븐이 마침내 자기의 길을 떠나며 세상에 일갈하는 장면인데 ‘그것은 더디고 어두운 탄생이며 육체의 탄생에 비해 더 신비한 거야. 이 나라에서는 한 사람의 영혼이 탄생할 때 그물이 그것을 뒤집어씌워 날지 못하게 한다고. 너는 나에게 국적이니 국어니 종교니 말하지만, 나는 그 그물을 빠져 도망치려고 노력할 거야’ 주인공이 마치 조이스와 같다는 생각을 지울 수 없다. 세상이 얽어매고 있는 보이지 않는 두려움의 실체를 나는 라오스에서, 지독한 외로움에 몸서리치던 때 알게 됐다. 그때 이 글을 읽고 마음속으로 많이 울었었다. 조이스를 보고 싶다고 생각하던 찰나 거짓말같이 지구의 오지 라오스에 O’Gradys 라는 아일랜드 식당을 발견했고 그곳에서 oh my god, 제임스 조이스 초상화 밑에서 하염없이 그를 바라본 기억이 새롭다. 그렇게 어두운 터널을 그와 함께 뚫어냈던 것이다.
시인 김수영은 1968년 6월 16일 죽었다. 전날 밤 술을 마셨고 귀가하던 중 버스에 치여 서울 적십자병원에 실려 갔지만 의식을 회복하지 못했다. 비교할 수 없는 걸 비교하지만, 제임스 조이스의 삶과 닮은 점이 꽤나 있다. 자신보다 술을 사랑했다는 점, 아내와 두 번 헤어질 위기가 있었다는 점은 표상적인 유사함이다. 반면, 엄격한 자기검열, 자유를 억압하는 모든 권위와 제약에 대한 무차별적인 거부, 세계에 대항하는 개인, 가난으로부터의 승리 등은 삶의 내적 상사성이다.
스승이 나에게 시 한 편을 외워보라 했던 적이 있었다. 툭 건드리면 술술 나오는 시 한 편은 외우고 있어야 한다, 그래야 거지 같은 월급쟁이 정체성이 나를 지배할 수 없다고 밑도 끝도 없는 믿음을 가졌던 때였다. 그날 읊은 시가 김수영의 ‘푸른 하늘을’ 이었다. 오, 이내 스승께서 나를 보던 시선이 달라졌었다. 그러나 나는 정작 시인에 관해 많이 알지 못했으므로 후달림을 느끼고 그날 이후 외웠던 시에 관해 다시 물어올까 김수영 전집(산문, 시)은 늘 내 침대 머리맡에 있게 됐다. 읽을수록 궁금해지는 시인이었다. 교과서에 나오는 시인이 이렇게 라디칼 해도 될까, 그의 작품 중에 ‘김일성 만세’라는 시가 있다. 김일성이라는 말만 꺼내도 곤죽이 되던 시대에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는 예술의 자세를 보여주며 살아있는 권력과 맞짱을 뜬다. 그리고 다시 ‘풀’과 ‘폭포’를 읽으면 정신이 번쩍 드는 것이다. 실제 그의 산문에서 ‘진정한 시인이란 선천적인 혁명가’라며 어려운 언어로 멋을 한껏 부린 현대 시를 쓰는 시인에게 쌍욕을 퍼붓는다.
개인적으로 좋아하는 그의 시는 ‘푸른 하늘을’이다. 가끔 힘들 때, 뭔가 시작하기가 겁이 날 때, 어려운 결정을 앞두고 있을 때 이 시를 찬찬히 읊으면 수영이 옆에 서서 내 어깨를 지그시 말하는 것 같다. “이 친구야, 시작은 그리고 살아내는 건 머리로 하는 것이 아니고 심장으로 하는 것도 아니고 몸으로 하는 거야. 온몸으로 밀고 나가는 거지. 정확하게 말하자면 온몸으로 동시에 밀고 나가는 거야” 또 지극히 개인적인 이유로 좋아한다. 이 시는 마치 내 졸저 ‘딴짓해도 괜찮아’를 온몸으로 축약하여 단 한 페이지로 만들어 낸 것 같다는 생각을 감히 한다. 그래서 김수영에게 늘 감사하며 이 시를 왼다.
푸른 하늘을 (김수영)
푸른 하늘을 제압하는
노고리지가 자유로웠다고
부러워하던
어느 시인의 말은 수정되어야 한다
자유를 위해서
비상하여 본 일이 있는
사람이면 알지
노고지리가
무엇을 보고
노래하는가를
어째서 자유에는
피의 냄새가 섞여 있는가를
혁명은
왜 고독한 것인가를
혁명은
왜 고독해야 하는 것인가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