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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규선 Sep 14. 2021

모친 이야기


"일 안 하면, 밥 안 주는 거야!"


식사할 때가 되거나, 시장기를 느낄 때 가끔 모친이 하시는 말씀이다.


그러면 나는 함박웃음을 지으면서 "그럴 리가 있나요? 조금만 기다려주세요!"라고 대답한다.


"식사하세요!" 하면, "명령입니까?" 하면서 웃으며 따르셨고, 조금 힘든 일이라도 하면, "오늘 밥값은 했지! "하면서 당당하셨다.


또 피곤한 날이면, "일찍 자면 법에 걸립니까?" 하면서 방에 들어가셨고, 내가 사진을 찍는 찰칵 소리를 내면서 조명을 끄면 즉시 잠자는 포즈를 취하셨다.


모친은 대인관계가 좋고, 또 유머감각이 뛰어나 주변 분위기를 즐겁게 하신다.


달 전에 뇌경색 진단이 나와 인지기능이 떨어진 모친을 정상으로 회복시키기 위해 나는 자주 얘기를 나눈다.


그런데 옛 기억은 잘 간직하고 있으나, 최근에 일어난 사실은 까마득하게 잊거나, 같은 내용을 반복하여 당황스럽다.


더구나 우리 집에 오신 지 한 달이 되어 어느 정도 적응한 줄 알았는데, 시신경 장애도 있어 그런지 아직도 모친 방과 화장실 위치를 몰라 헤맨다.


모친의 기억을 되살리는 대화를 나누다 보면 처음 듣는 얘기가 많이 나와 듣는 재미가 쏠쏠하다.


시댁에 비해 비교적 부농 집안이었던 모친이었지만, 할아버지부터 아버지 형제들 그리고 모친 남매까지 12명 식구가 한집에 산다는 것이 그다지 녹록지 않았다.


모친은 10대 중반에 어머니가 세상을 떠나셔서 주로 조부모 손에 자랐고, 그분들을 통해 어린 나이였지만 세상 밖을 볼 수 있었다.


수줍음이 많은 3살 터울 언니 대신에 심부름을 도맡았고, 수지 풍덕천이 고향이지만 할머니 손을 잡고 멀리 수원에 가서 옷과 신발을 구입했다.


어느 날, 모친은 먼 친척에게서 재봉틀을 샀는데, 그때

할아버지가 20살도 안된 모친에게 "조만간 소도 사겠구나" 하며 대범하다고 하셨다.


그런데 나중에 알고 보니 그 친척은 집에 쓰던 것을 비싸게 팔았는데, 모친은 미안한 생각이 들어 열심히 재봉질을 배웠고, 그동안 느리게 손바느질하던 것을 순식간에 봉제하여 귀염을 받았다.


모친은 나와 비슷한 면이 많아 보인다.


겁이 많고, 벌레가 있는 시골보다는 깨끗한 도시에 사는 것을 선호하며, 또 사람 만나는 것을 좋아해서 지금도 수시로 친척, 고향 친구들에게 전화하며 안부를 묻는다.


일례로 50년이 넘는 아주 오래전에, 모친은 서울대 건축과(ROTC 5기)를 나온 사촌형님의 졸업식에 갔는데 그때 박정희 대통령을 처음 봤다고 하셨다.


말하자면, 8남매의 맏인 사촌 큰누님과 집안 대표(?)로 몇 살 차이 나지 않는 조카의 졸업식에 참석하는 정성을 보여주었고, 이는 우리 아이들 졸업식 사진을 보면 금방 알 수가 있다.


시누이올케 사이인 2살 아래 고모와 하루가 멀다 하고 전화하다 보니, 최근에 웃지 못할 해프닝이 생겼다.


사촌동생이 오랜만에 집에 갔는데 정문이 잠겨, 고모에게 전화하니 계속 통화 중이어서 기다리다가 지쳐서 사람 키높이의 담을 넘었다.


그런데 현관문도 잠겨서, 창문을 두드려 겨우 들어가 확인하니 그날도 모친과 30분간 통화했던 날이었다.


대낮 35도가 넘는 무더위는 차치하고, 만일 밤이었다면 멋쟁이 신사가 도둑으로 몰렸으리라!


그때 들은 또 다른 얘기다.


올해 96세 동갑이신 백 부모님이 안양에 사시는데 피곤하다면서 서로 눈치 보며 누가 먼저 누우면 마지못해 다른 분이 밥 짓기와 설거지를 하신다고 하였다.


작년까지 백부는 서예전시회에 출품할 정도로 명필이었고, 또 자전거로 시내를 누빌 정도로 노익장을 과시했는데 금슬 좋은 노부부도 어느덧 세월 앞에는 장사가 없는 것 같아 안타깝다.


모친의 말투를 살펴보면 재미있어 웃음이 저절로 나온다.


말도 안 되는 얘기를 들었을 때의 반응은, "됐다 그래!"

처음 듣는 얘기일 때는, "그런 거야?"


무엇을 진지하게 설명할 때는, "가만히 보면, ~~~~"


그럴 때 나는 짓궂게 되묻는다.


"엄마!  꼭 가만히 봐야 하나요?  조금 흔들면서 보면 안 되나요?"


글쓴이, 서치펌 싱크탱크 대표 이규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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