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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규선 Sep 13. 2021

곰배령에서

주말에 강원도 인제 점봉산에 있는 곰배령을 다녀왔다.


등산을 좋아하는 친구들에게서 수없이 들어왔고, 하물며 등산과 무관한 아내가 수 년 전에 친구들과 1박2일 코스로 인근 펜션에 묵은 뒤 오른 뒤에 곰배령 얘기만 나오면 자랑하던, 그곳을 처음으로 올랐다.


유네스코 산림유전자원 보호구역으로 선정된 후에 하루 300명만 입산 허가를 받는데 그나마도 몇 분 안에 인터넷 예약으로 마감되어 쉽게 갈 수 없는 산이 되어버린 곰배령을 한달 전에 모교에서 간다는 소식을 접하고 언제 가보겠냐 생각하며 즉시 예약했다.


1164미터 높이에, 850개 야생화가 유명한 평원으로 마치 곰이 배를 드러내고 누워있는 모습이라며 곰배령을 재미있게 소개하는 후배 가이드의 얘기에 집중하기위해 나는 넋 놓고 버스 차창으로 강원도의 아름다운 풍경을 보고 있다가 그의 이야기속으로 빠져 들어갔다.


신분증을 꼭 지참하고, 정해진 장소 이외에 들어가면 벌금을 내야하며, 늦어도 12시에 입산해서, 오후 2시에는 하산하는 조건들이 부담스러웠지만, 나는 선택받은 등산객으로서 이것은 마땅이 준수해야 한다고 생각하며 천천히 올라갔다.


한계령을 사이에 두고 설악산과 점봉산으로 나뉘어 있는 이곳은 1987년 이후 오랫동안 사람의 발길이 끊겼고, 최근에 제한적으로 개방하여 그만큼 자연 그대로의 모습을 느낄 수 있었다.


다소 쌀쌀한 초가을이지만 오르다보니 참을만 하였고 , 올라가는 길은 왼편에 계곡이 흐르고, 구불구불한 것이 한동안 올랐던 도봉산 망월사같아서 좋았고, 그다지 비탈지지않아 발걸음이 편해 마치 원시 자연 속을 거닐며 힐링하는 느낌이었다.


땅만 쳐다보다가 가끔 고개들어 보는 하늘은 차갑게 보여 땀방울을 식혀주는 것 같았고, 올라갈수록 계곡에서 흐르는 힘찬 물소리는 내 거친 숨소리와 화음을 이루었고, 불규칙한 박자 또한 비슷하게 변해갔다.


그러나 맑은 공기를 마시며, 사람 좋은 친구와 이런저런 얘기를 나누며 걸으니 생각보다 그다지 힘들지 않았다.


두사람의 어깨가 부딪칠 정도로 좁은, 키 작은 나무숲 터널로 들어가니 우리는 갑자기 난장이가 되었고, 나무 사이로 살짝 하늘이 보이는가 하더니,  1시간 반만에 수만 평의 곰배령 고개마루에 도착했다.


야생화 군락지로 '천상의 화원'이란 이름을 가진 곰배령은 만물이 소생하는 봄에 오거나, 아니면 단풍이 아름다운 가을에 오면 좋다는 가이드의 말을 실감하여 다소 실망하였으나, 넓게 펼쳐진 평원은 그 자체가 그림이었고, 점봉산 정상까지 길게 뻗은 시원한 능선을 보니 왜 곰배령라는 이름을 지었는지 그 이유를 쉽게 알 수 있었다. 


우리는 몇 분 기다린 끝에 곰배령 안내석을 배경으로 사진은 찍었으나, 세찬 바람은 편히 앉아 요기하려는 우리를 가만 두지않았고, 그때서야 5월 중순부터 10월 말까지만 이곳을 개방하는 이유를 이해할 수 있었다.


비록 웅장하지도 험하지도 않아 여자들이 좋아한다는 곰배령은 우리같은 트레킹족들에게도 안성맞춤이었고, 아름다운 알프스가 배경이 된 영화 사운드오브뮤직을 한국에서 단 한군데만 찍는다면 단연코 이곳이어야 한다고 생각하며 하산하였다.


하산도중에 곰배령 정상 전망대에서 멀리 보이는 설악산 대청봉에 오늘부터 단풍이 들었다지만, 이곳은 키 작은 빠알간 단풍나무가 새색시마냥 부끄러운듯이 한 두 그루 눈에 띄어 거리감을 느끼게 하였다.


나는 따스한 바람이 부는 어느 봄날, 이곳 곰배령에 앉아 낮에는 이름모를 꽃과 풀을 바라보며, 밤에는 머리 위까지 내려온 수 많은 별들을  마주보며 이야기를 나누면 누구든 멋진 시인이 될 수 있을 것이라고 생각하며 미소지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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