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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규선 Sep 16. 2021

시카고 큰 형님


내가 어렸을 때, 고종사촌 큰 형님이 주간지 선데이서울에 소개되었다.


선데이서울은 다소 퇴폐적이었지만, 무척 인기 있는 잡지로 앞뒤 몇 면과 중앙 한 면은 칼라로 인쇄되었고, 나머지는 모두 흑백이었다.


그 당시 뭇 남성들이 선데이서울을 사보는 이유 중에 하나는 비키니를 입은, 야한 여성 사진이 있는 앞, 뒤 몇 페이지를 보기 위한 것임은 과언이 아니었다.


그런데 가운데 페이지에는 장래가 촉망되는 젊은이를 매주 한 사람씩 선정하여 칼라로 찍어 올렸는데, 서울대 건축과를 나와 ROTC 장교로 복무 후에 남산 어린이회관 현장소장이었던 큰 형님이 소개되었다.


집안의 경사여서 우리는 기뻐하며 그 기사를 읽었는데, 가족관계를 보니 8남매가 아니라, 5남매 중에 장남으로 소개되어 어린 나까지 실소하였다.


그 시절은 다산이 유행이었으나, 결혼하는데 지장이 있었는지 그런 해프닝이 있어 사촌 여동생들을 만날 때마다 호적에도 없이 거저 산다고 놀렸는데, 최근에 4번째, 5번째가 어린 나이에 병으로 죽어 총 10남매라는 사실을 뒤늦게 알았다.


큰 형님은 서울대 간호학과를 나온 형수를 따라 40년 전에 미국 시카고로 이민을 갔고, 십여 년간에 걸쳐 하나 둘 초청받은 동생들은 로스앤젤레스에 살고 있다.


현재 8남매 중에 팔순을 바라보는 큰누님과 작은 형님을 제외하고, 모두 미국에 살고 있는데

얼마 전에 조카 결혼식에 참석하려고 6남매가 모두 방한하였다.


지금의 분당구 정자동(과거 정 잣 말)에서 태어나 자란 큰 형님은 그 시절이 그리워 이번에 정자역 근처에 숙박하였고, 30여 년 전에 찍은 집과 동네 비디오를 DVD로 바꿔 보여드리니 감회가 새로운 듯 눈망울이 촉촉하였다.


형님은 딸만 셋을 두었는데, 큰애(시카고 의대 수석졸업)는 부부의사로 네팔 오지에서 의료선교를 5년째 하고 있고, 막내도 의사로 시카고에 살고 있다.


자식농사를 잘 지은 큰 형님은 시카고에서 성공한 건축가로 은퇴하여 적지 않은 연금을 받으며 편하게 살려고 했는데, 최근 방한 며칠 전에 둘째 딸의 미국인 남편이 40세도 안되어 심장마비로 죽어 딸과 손주까지 책임지는 신세가 돼버렸다.


그렇지 않아도 작년에 심장수술을 받은 형님은 오래 걸으면 숨이 차는 환자여서 간호사 출신인 큰형수님이 늘그막에 설상가상 가족을 책임지게 되었다!


큰 형님은 동생들이 모두 미국으로 돌아간 후에 1주일 더 쉬었다가 엊그제 홀로 시카고행 비행기에 올랐다.


군 시절 공병장교로 전후방을 누볐고, 건축기사로 한국에서, 세계 최고의 건축도시인 시카고에서  마천루를 수놓았던 화려했던 형님의 젊은 시절은 덧없이 흘러가버렸다.


멀리 이 국 만 리에서 옛날 정자동 모습을 DVD로 보며, 고향을 그리며 쓸쓸히 노년을 보낼 큰 형님을 생각하니 가슴이 무척 아프다!


글쓴이   서치펌  싱크탱크  대표 이규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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