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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규선 Oct 06. 2021

군대영화 촬영

내가 중위 시절 1사단 전방(판문점 근처)에서 4개월간의 긴 GP 근무를 마친 후, 부대에 복귀하여 대대장에게 신고하였다. 대대장은 “수고했다” 하고는, 휴가는 잠시 보류하고 영화 촬영의 인원 감독으로 나가라고 명령하였다.

군대에서의 보류는 사실상 시간이 지나면 포기하는 것과 다름이 없었다. 그런데 나 이외에는 그것을 담당할 장교가 없었고, 할 수 없이 나는 후배 장교 2명과 함께 2박 3일간 250여 명이 넘는 사병을 통솔하며, 경기도 적성 인근의 야산에서 생활하였다.

그 당시 영화감독들은 의무적으로 1년에 1편의 군 영화를 촬영하게 되어 있었고, 유명한 신상우 감독의 수제자인 박철수 감독(접시꽃 당신, 학생부군신위 등)은 “흔들린 산하 (강태기, 이영옥 주연)”를 촬영하고자 우리 부대에 병력동원을 요청했던 것이다.

본격적인 영화 촬영 시, 대부분의 사병들은 소품 담당자에 의해 병아리 암수 감별하듯 순식간에 아군과 적군으로 나누어졌다. 물론 건장하고 잘 생긴 10여 명의 사병들은 아군으로 선발되어 깨끗하게 차려 입고 영화배우들과 함께 대기해 있었고, 나머지 중공군(?)들은 더운 날씨에도 불구하고 수차례 산을 오르내리며 인해전술 연기를 했다.

미리 약정된 장소에 폭약이 터졌고, 그 사이를 뚫고 올라온 적군이 드디어 아군과 육박전을 하는 등 제법 실감 나게 연기하였다. 그중 빈약하게 보이는 중공군 사병은 덩치가 큰 아군 병사(영화배우)에게 수차례 업어치기 한판으로 내팽겨져(?) 나중에는 실신할 지경이 되자 박철수 감독의 OK 사인이 났다.

박 감독과 점심식사를 할 때, 중공군 장교로 열연한 김천만 씨(탤런트, 최근 KBS “대추나무 사랑 열렸네” 출연)를 나에게 소개하였다.

나는 청계 국민학교 시절 “저 하늘에도 슬픔이”(김수용 감독, 신영균, 주증녀 출연)라는 영화를 보고 엄청나게 울었던 기억이 있다. 그런데 그 영화의 남자 주인공이 ‘김천만’이었고, 그는 나와 같은 동네(중구 장교동, 현재 을지로입구)에 살았다.

무려 십여 년 만에 그를 다시 만난 것이었다. 그는 나보다 5~6세 위로서, 그 당시 한창 잘 나가는 영화배우였고, 동네에서 가장 화려하고 큰 집에 살았으며, 우리들 놀이터인 그의 넓은 앞마당은 그 당시 인기 있던 배우들을 종종 볼 수 있는 장소였다.

추석 무렵에 우리는 폭음탄을 갖고 놀았는데, 그는 연탄구멍에 비싼 로켓탄을 꽂고 발사시켜 우리들의 부러움의 대상이었다.

그런 그를 군 영화의 중공군 장교로서, 나는 병력 통솔 장교로서 다시 만난 것이었다. 그는 군 시절 유격대 조교를 했다며, 휴식시간에 조교 특유의 말투로 영화 촬영에 동원된 우리들 수백 명을 웃겼다.

한때  나를 감동시킨 그 당시 최고 인기 영화의 주인공으로서, 같은 동네에 사는 부잣집 아들로 나는 한동안 그를 나의 일그러진 영웅(이문열 소설)으로 생각했다.

영화 촬영은 성공리에 마쳤고, 그다음 해 새해 첫날 부대에서 우리는 그 영화를 볼 수 있었다. 잘 생긴 김하사(아군)는 죽는 연기를 실감 나게 하여 감독에게서 소질이 있다고 칭찬받았고, 부대원들은 영화 장면 하나하나에 신경을 쓰며 혹시 자기가 어디에 있는지 뚫어지게 쳐다보던 기억이 새롭다.

무려 23년 전 이맘때의 일이다.

글쓴이, 서치펌 싱크탱크 대표 이규선 (2005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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