첫눈과 기다림
새벽부터 카톡방이 뜨겁다. 아이처럼 기다렸던 첫눈이라 그에 어울리는 사진과 동영상이 몇 개 올라왔다. 그중에 수녀시인 이해인의 '첫눈'이 마음에 와닿는다.
함박눈 내리는 오늘
눈길을 걸어
나의 첫사랑이신 당신께
첫 마음으로 가겠습니다
언 손 비비며
가끔은 미끄러지며
힘들어도
기쁘게 가겠습니다
하늘만 보아도
배고프지 않은
당신의 눈사람으로
눈을 맞으며 가겠습니다
'첫눈' 하면 수많은 노래 중에 왜 하필 가수 진성의 히트곡 '안동역에서'가 생각날까? 트로트를 좋아해서? 가사가 멋있어서? 아무튼 둘 다 맞는 말이다.
"첫눈이 내리던 날 안동역 앞에서 만나자고 약속한 사람" 무척 정감 있는 가사다. 그런데 곰곰이 생각해 볼 일이다. 약속한 사람은 동성이 아니라, 2절 가사를 보면 사랑이 나오는데 이성친구 혹은 연인사이가 맞을 것이다.
그런데 휴대폰이 없던 시절에 만든 노래인가, 안 오면 전화라도 해야 하지 않겠나? "새벽부터 오는 눈이 무릎까지 덮는데" 이는 재난 수준이다. 서둘러 집에 가야 한다. 더구나 "안타까운 내 마음만 녹고 녹는다. 기적 소리 끊어진 밤에"는 가관이다. 적당히 해야지 막차가 떠날 때까지 추운데 덜덜 떨며 기다리다가 결국 놓쳤다는 얘기 아닌가?
서로 좋아했는지 확인하려고 애타게 기다리는 모습을 잘 표현했다. 그렇지만 여기에 근본적인 문제가 있다.
사는 지역이 같을 경우에는 이해할 수 있다. 하지만 눈의 양이 적어 첫눈이 왔다고 해야 하나 망설일 수 있고, 제한된 공간에서 생활해 내리는 눈을 못 볼 수도 있다.
만일 다른 지역에 산다면 얘기가 더 달라진다. 먼저 눈을 본 사람이 노랫가사처럼 안동역에서 기다릴 수 있다. 그러나 더 따뜻한 곳에 사는 사람은 언제 눈이 오나 수시로 하늘을 쳐다보고, 기상청의 일기예보에 집중해야 한다. 예보가 틀리면 원망이라도 해야 할까?
오늘 첫눈이 내려서 반가운 마음에 노랫가사의 함정을 조목조목 문제 삼아 우스갯소리를 해봤다. 더불어 오래전 기다림에 지쳤던 추억을 되새겨 본다.
학창 시절에는 친구를 주로 종각 옆 종로서적에서 만났다. 일찍 오면 위층에서 책을 봤고, 약속시간이 되면 1층으로 내려와 목이 긴 사슴처럼 기다리곤 했다.
이성 친구의 경우는 주로 다방이나 카페에서 만났는데 정시에 오면 다행이나, 늦어지면 초조해진다. 5분 정도면 이해되나, 10분, 15분을 넘기면 약속시간을 잘못 알았나, 아니면 장소가 다른가 확인하게 된다.
그렇다 보니 처음에는 느긋한 표정이었다가, 꼬던 다리도 바꾸며 애꿎은 성냥개비만 작살낸다. 그러다가 다방레지의 눈초리를 더 이상 견딜 수 없어, 오면 같이 마시려던 계획을 포기하고 커피를 주문하며 당당히 자릿세를 낸다. 그런데 뜨거운 커피가 냉커피로 변하는 시간은 그리 길지 않다.
시간이 지나면서 가수 노고지리가 부른 '찻잔'의 감성적인 다방 분위기는 서서히 내 마음속을 떠나고 있다. 다만 아프거나 오다가 사고가 일어나지 않기를 바라며 온갖 상상의 날개를 펼치기 시작한다.
입구를 바라보면서 애국가를 4절까지 읊조리며 체념한 상태로 30분까지 더 기다린다. 그래도 늦는다면 만나지 말아야지 다짐하면서...
하지만 다방 연락처를 안다면 늦더라도 전화할 텐데 기대하면서, 한없이 떨어진 나의 자존심과 미련과의 싸움을 묵묵히 지켜본다.
한계가 온 것 같다. 3분 남았다.
펄시스터즈의 노래 '커피 한잔'의 "8분이 지나고 9분이 되네. 1분만 지나도 나는 가요" 사랑하는 사람을 기다리는, 상큼하고 경쾌한 노래다. 그런 10분간의 속을 태우는 설렘도 이미 내 곁을 떠났다.
머리를 만지고, 옷매무새를 고친 후에, 마지막으로 한 모금 남은 식어버린 커피까지 마시고 일어서는 순간 기다리고 기다리던 그녀가 짠하고 나타났다. 미안한 마음을 가득 안은 채로~~~ 예쁘니까 그때는 모든 것이 용서되었다.
그러나 나는 몇 년 후에 약속을 잘 지키는 다른 여자와 결혼했다.
예나 지금이나 눈이 오면 누구나 시인이 된다. 그만큼 낭만이 있다는 얘기일 것이다. 거실 창 너머 바라본 세상은 설국이다. 서울과 경기도 사람이라면 누구나 인정하는 그야말로 첫눈이 왔다.
그런데 저녁뉴스를 보니 서울은 기상관측 이후 117년 만에 11월 최고 적설량이고, 원주에서는 차량 53대 추돌사고가 났다고 한다.
뭐든 적당히 해야 되는데, 이것은 폭설이 아닌가! 노래 가사처럼 새벽부터 오는 눈이 무릎까지 덮지 않을까 걱정된다. 우선 차 위에 쌓인 눈부터 치워야겠다.
글쓴이, 나그네 인생 이규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