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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규선 Sep 13. 2021

TV와 도쿄 올림픽


밤새워 비싼 에어컨을 켜놓을 수 없어 날마다 아이스팩을 수건에 둘둘 말아 얼굴에 대고, 선풍기와 벗하며 잠을 자지만, 연이은 열대야 때문에 하루 종일 비몽사몽이다.


수많은 사람들이 휴가철을 맞아 강원도, 제주도로 여행을 떠나지만, 무더위를 피하려 해도 서울시내 어디 갈 만한 곳이 없고, 그렇다고 예전처럼 축령산과 유명산 계곡에 가고 싶은 생각도 잊은 지 오래다.


왜냐하면 요즘 들어 코로나가 더 극성이고, 피서철이라 여행지마다 바가지요금에 교통체증까지 심해 집에서 쉬는 것이 상책이 되었다.


나이를 먹다 보니 허투루 시간을 보내는 것이 아까워 책을 읽었고, 친구들을 만났으며, 혼자라도 이곳저곳 여행하며 시간을 보냈다.


가는 곳은 계절마다 달랐고, 그날의 날씨와 기분에 따라 좌우되었으며, 또 중요 행사가 있는 곳이면 가능한 빠트리지 않고 찾아다녔다.


그곳은 주로 서울과 경기도의 산이었고, 무더워지면서 서울의 북촌, 청계천, 대학로 그리고 경기도의 양평과 남한산성 등 드라이브코스로 바뀌었다.


그래도 친구들이 보고 싶어 전화하니 대부분 두문불출하였고, 날이 선선할 때 만나자는 얘기가 인사치레였다.


아쉽지만, 이럴 때는 집에서 TV로 도쿄올림픽 경기를 보는 것이 낙(樂)이다.


코로나 때문에 방콕 할 것 같아 작년 봄에 큰맘 먹고 75인치 QLED TV를 구입한 후에 시간이 날 때마다 넷플릭스 영화를 보았고, 특히 '걸어서 세계 속으로' 같은 여행 프로그램이나 다큐멘터리를 볼 때 "역시 TV는 클수록 보는 느낌이 좋다!"는 생각을 했다.


생각해 보니, 나는 올림픽에서 열심히 뛰는 선수들의 생생한 모습을 보려고 수년 전에 어느 업체 광고에 현혹되어 3D TV를 구입했었다.


처음에는 입체적으로 보여 신기했지만, 특수안경을 쓰니 불편했고, 보는 내내 어지러워 포기한 후에 그다음부터는 2D로 변경해 보았다.


갑자기 TV 얘기를 꺼내니 어릴 적 기억이 떠오른다.


국민학교 시절 한창 인기 있었던 TV 만화영화 '황금박쥐'나 '요괴인간'을 보려고 저녁을 쫄쫄 굶어가며 4살 아래 내 동생의 친구 집 방구석에 우리 형제가 나란히 앉아 봤던 씁쓸한 경험이 있고, 용돈이라도 생기면 동네 만화가게에서 당당히 TV를 봤다.


청계천(을지로입구) 판잣집에 살다가, 국민학교 5학년 말에 서대문구 북아현동 양옥집으로 이사 갔을 때 처음으로 우리 집에 19인치 흑백 TV가 등장했다.


안테나가 달린 흑백 TV에 리모컨이 없는 로터리식이라 손으로 직접 채널을 돌렸고, TV 화면이 잘 안 나오면 한 사람이 옥상에 올라가서, 소리를 지르면서 실외안테나를 좌우로 돌려 안테나 방향을 맞추곤 하였다.


그 당시 김일, 홍수환 등의 운동경기, 아씨와 여로 같은 드라마와 보난자, 초원의 집, 육백만 불의 사나이 등 외국 드라마를 보면서 학창 시절을 보냈다.


그런 흑백 TV 시절이 지나고, 내가 ROTC 장교로 군 복무할 때 두 달치 월급을 모아 24인치 칼라 TV를 사니, 말 그대로 총천연색으로 만들어진 새로운 세상이 보여 인생이 즐거웠다.


그 후 결혼해 아이들이 자라는 모습을 비디오테이프에 담았고, 이를 최근에 USB에 넣었는데, 가끔 옛 시절이 그리워 과거 영상을 보면 재미있어 웃음이 나오지만 화면이 깨끗하지 않아 아쉬웠다.


그래서 "죽기 전에 전자제품을 사야 품질이 최고다"는 얘기가 전혀 틀린 말은 아니라고 생각한다.


어젯밤 도쿄올림픽에서 우리 남자 선수들이 미국과 야구를, 또 멕시코와 겨룬 축구경기를 보고 마음이 언짢았지만, 김연경을 포함한 우리 여자 배구선수들이 숙적 일본과의 경기에서 남다른 투지와 집념으로 극적으로 이긴 모습을 보며 위안을 삼았다.


8월 8일이 폐막일이니 딱 1주일 남았다.


나는 세상에서 가장 편한 자세로 소파에 앉아, 냉커피를 마시며, 마치 영화관처럼 커다란 TV 속에 빠져 올림픽 경기를 즐기고 있다.


내 바로 옆에는 모친이 소파에 푹 기대어 꿈나라를 여행하신다.


글쓴이, 서치펌 싱크탱크 대표 이규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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