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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규선 Sep 13. 2021

그냥 걸었어!


책, 음악과 벗하며 오전을 보내고, 점심시간이 다가와 취준생인 아들이 좋아하는 중화요리로 실력을 발휘하려고 끓는 냄비에 짜파게티를 넣을 때 여동생에게서 전화가 왔다.


오후에 약속이 없으면 부부동반으로 고기리에 있는 카페에서 차를 마시고, 인근 광교호수공원에서 이른 저녁을 한 후에 호수 둘레길을 걷자는 얘기였다.


그렇지 않아도 여동생 부부를 만난 지 오래되었고, 이미 두 차례 해외여행을 함께한 경험이 있어 코로나가 잠잠해지면 해외는 못 가더라도 1박 2일, 아니 당일치기라도 국내 어디에 놀러 갈 계획이 있는지 궁금했었다.


우리는 분위기 좋은 고기리 '일카 스텔로'라는 노천카페에서 연초 암수술을 받아 고생했던 매제의 고생 담부터 사업 얘기, 아이들 얘기까지 환담하며 커피를 마셨다.


그곳은 주변 카페에 비해 가성비도 좋지만, 졸졸 흐르는 시냇물을 내려다보고, 시원한 바람을 온몸으로 느끼며, 게다가 죽이 잘 맞아 주거니 받거니 맞장구를 치니 행복이 따로 없었다.


자리를 옮겨, 우리는 수원 컨벤션센터 3층 '행궁 정찬'의 열린 창가에 앉아 넓은 호수공원을 바라보며 저녁을 먹으니 정말 꿀맛이었다.


그리고 묵직한 배를 어루만지며, 소화도 시킬 겸해서 과거 젊은이들의 데이트 코스로 유명했던 원천유원지(광교호수공원)를 걸었다.


학창 시절 친구들과 호수에서 보트를 탄 기억, 그리고 아이들이 어렸을 때 유원지 입구부터 풍선에 총쏘기, 인형 뽑기를 시작으로 퇴약별 아래에 줄 서서 기다리다가 놀이기구를 탔던 일들을 떠올리니 살짝 웃음이 나왔고, 또 수 십 년 세월이 유수처럼 흘러가 덧없음을 느꼈다.


우리는 어느 노부부가 쉬고 있는, 전망 좋은 벤치 옆자리에 앉아 호수를 바라보며 잠시 얘기를 나눴다가, 여동생이 친구들과 자주 갔다는 장소로 이동했다.


그곳은 둘레길과 떨어져 있어 조용했고, 녹색 파라솔이 주변 정원과 조화를 이뤄 마치 숲 속에 들어와 있는 것 같아 우리는 음료수와 과자를 꺼내 먹으니 소풍을 온 기분이었다.


지금 상전벽해된 분위기를 얘기하며, 원천유원지 시절에 조금이라도 땅을 사두었으면 좋았을 것이라면서 씁쓸해하였다.


수원이 처가라서 가끔 차로 둘레길을 드라이브하거나 주변 맛집에서 식사한 것이 전부였는데, 10년 넘게 오랜만에 와보니 아름다운 호수와 둘레길, 세련된 카페와 식당가로 변모해 이곳에 사는 주민들은 얼마나 좋을까 생각했다.


석양에 비친 호수는 더욱 멋져 어디 내어놓아도 손색없는 풍광을 보여주었고, 어느 누가 찍어도 작품사진이 되었다.


날이 어두워지면서, 주변 카페와 식당에 하나 둘 불이 들어와 운치가 있었고, 특히 어느 호프집은 노천에 자리를 마련하여 못하는 술이지만 친구들과 호수를 바라보며 맥주 한잔 하고 싶었다.


그냥.......!"


그렇다. 우리에게는 '그냥'이라는 말이 있다. 원인은 있지만 그 원인이 아주 불분명할 때 쓰는 말이다.


하지만 이 '그냥'이라는 말은 허물없고, 단순하고, 그러면서 오히려 따뜻하게 정이 흐르는 말이다!


여동생이 그냥 전화했는데, 내가 공교롭게도 약속이 있어 거절하면 언제 또 기회가 있을까!


만일 그때가 무더운 여름이라면, 분위기 좋은 고기리 노천카페와 전망 좋은 한정식 식당이라도 그다지 즐겁지 않을 것이고, 더구나 광교호수공원을 땀 흘리며 한 바퀴 다 돌았을까!  아닐 것이다!


"정말이야 처음엔 그냥 걸었어

비도 오고 기분도 그렇고 해서

정말이야 거짓말이 아냐

미안해 너의 집 앞이야

난 너를 사랑해 우우우

우우 우우 우우 우우우

우우 우우

나 그냥 갈까 워워 우워 우워

워워 워"


가수 임종환의 '그냥 걸었어'(1994년)라는 무척 감성 있는 노래다.


노래 중간에 나오는 가사인데, "정말이야 처음엔 그냥 걸었어"라는 글귀가 말 그대로 정말일까!


이는 보고 싶은 간절한 마음이 들어있는 반어법인데, 그 뒷 가사를 읽으면 그 깊은 속 뜻을 쉽게 이해할 수 있다.


아무튼 빨리 코로나가 종식되어 ''그냥''이 어떤 의미든 우리 일상이 되었으면 좋겠다.


"그냥 걸었어!"

"그냥 만나자!"


글쓴이, 서치펌 싱크탱크 대표 이규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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