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이규선 Sep 13. 2021

빛바랜 흑백사진


엊그제 용산경찰서 인근으로 사업장을 옮긴 K를 만나 함께 식사했다.


서둘다 보니 20분 일찍 도착해 약속 장소인 경찰서를 중심으로 동네 구경을 하며 시간을 보냈다.


천천히 걷다 보니 오래된 건물이 많이 보여 정감이 갔고, 특히 칼빈신학교로 올라가는 좁은 골목길은 낡은 축대와 적산가옥으로 보이는 집이 있어 1960년대 과거로 시간여행을 떠나는 것 같았다.


K에게 이사했던 얘기를 들어보니, 제품구조상 포장이사를 할 수 없어 짐꾼 2명과 지하 1층에 수백 개의 커다란 박스를 내린 후에 특성에 맞게 분류하였고, 그것을 70~80평 넓은 공간에 천장까지 높게 쌓았는데 아직도 마무리가 안되었다고 한다.


요즘은 이사대행업체들이 있어 무척 편하나, 옛날에는 집을 옮길 때마다 적어도 한 달간 포장하고, 이사 간 뒤에도 원상태로 정리하느라 온 가족 몸살이 날 지경이었다.


그때 은근히 신경 쓰이는 것 중에 하나가 앨범이었다.


처음에는 신줏단지 모시듯이 관리해 1년에 몇 번이고 꺼내보고, 조심스럽게 페이지를 한 장씩 넘기면서 사진을 보면 시간 가는 줄 모른다.


그러다가 어떤 사진에 필이 꽂히면 마냥 바라보게 되고, 사진에 얽힌 사연을 생각하면 블랙홀처럼 사진 속으로 빨려 들어간다.


이는 가수 백난아가 부른 '찔레꽃' 가사 속에도 표현되어 있다.


찔레꽃 붉게 피는 남쪽나라 내 고향

언덕 위에 초가삼간 그립습니다

자주 고름 입에 물고 눈물 젖어

이별가를 불러주던 못 잊을 사람아


달뜨는 저녁이면 노래하던 동창생

천리 객창 북두성이 서럽습니다

년 전에 모여 앉아 찍은 사진

하염없이 바라보던 즐거운 시절아


2절에 보면 "삼 년 전에 모여 앉아 찍은 사진 하염없이 바라보던 즐거운 시절아"이라는 노래 가사를 들으면 내 가슴이 애잔해진다.


그래서 나는 몇 장의 사진을 꺼내 탁자나 장식장 위에 올려놓고 수시로 쳐다보는데 그것도 많아지면 집안이 어수선하고, 싫증난 사진을 교체해 액자에 넣는 것도 귀찮아 관둔 지 꽤 오래되었다.


그러다 보니 내 첫돌 사진부터 우리 아이들 중고교 시절까지 찍은, 두껍고 무거운 앨범들은 책장 밑에 혹은 창고에 처박혀 있는데, 바쁘게 살다 보니 수년이 지나도 꺼내본 적이 없어 존재를 잊곤 했다.


그 후 디지털카메라로 찍고, 사진을 컴퓨터에 저장한 후에는 현상한 적이 거의 없어 앨범은 애물단지가 되었고, 더구나 애들 첫돌부터 최근까지 촬영한 비디오테이프도 상당히 많아 앨범은 공간만 차지하는 골칫거리가 되었다.


그래서 10여 년 전에 구입한 것이 전자액자였고, 창가에 앉아 차를 마시며 사진을 쳐다보는 재미가 쏠쏠하다.


디카로 다시 찍은 옛 사진과 최근에 찍은 휴대폰 사진 수백 장을 USB에 담아 슬라이드식으로 보는데 찔레꽃 노래 가사처럼 하염없이 바라보는 느낌이 너무 좋다.


시간이 멈춘 듯한 용산경찰서 주변 골목을 회상하니 갑자기 내 어릴 적 흑백사진이 보고 싶어졌다.


그런데 내가 찾는 앨범은 책장에 있을까, 아니면 창고에 있을까!


글쓴이. 서치펌 싱크탱크 대표 이규선

작가의 이전글 밤눈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