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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규선 Sep 13. 2021

예비농부


올 4월부터 강원도 홍천에서 귀농교육을 받고 있는 전 직장동료 L이 지난여름에 시간이 있으면 놀러 오라고 하였다.


나는 혼자 가기는 멀어서 그가 그곳에서 무엇을 배우며 지내는지 궁금해 친구들과 함께 가려고 했으나 그때마다 각자 약속이 있어 불발되었다.


이러다가 결국 못 가는 것이 아닌가 해서, 어제 오랜만에 L에게 전화하니 수개월간의 귀농교육을 마치고 내일 수료한다고 하여, 오늘 부랴부랴 아내와 그곳을 다녀왔다.


태백산맥의 영향으로 지세가 높은 험준한 산악지대인 홍천은 대추·밤·송이버섯이 생산되고, 특산물로 잣이 유명하다고 한다.


인터넷으로 확인해 보니 집에서 홍천 귀농교육센터까지 차로 2시간 걸린다고 했는데, 평일 아침이라 그런지 춘천으로 가는 고속도로는 시원하게 뚫려 예상보다 20분 일찍 도착했다.


L의 안내로 우리 부부는 그동안 그가 거주했던 원룸에 들어가 보았고, 교육장부터 농기계보관소, 묘목실, 체육관 그리고 수천 평의 넓은 실습농장까지 두루 견학하였다.


얘기를 들어보니 농림수산부 산하 귀농교육센터가 전국에 8곳이 있는데, 홍천이 서울에서 지리적으로 가까워 제일 경쟁률이 높았고, 입주자격 심사기준은 노인보다는 젊은이, 개인보다는 부부, 그리고 귀농하려는 의지 등을 우선순위로 보았다.


L은 매주 월요일에 홍천에 와서 목요일까지 귀농의 기초부터 트랙터 운전까지 배웠고, 올해 4기 수료생 25가구(그중 부부는 5가구) 중 절반이 이미 강원도 곳곳에 토지를 매입하여 내년부터 농작물과 과실수를 심을 것이라고 하였다.


우리는 교육센터 인근에 있는 가성비 좋은 고깃집에서 식사를 한 후에, 경치 좋은 곳을 구경시켜 준다기에 그의 차를 따라 '척야산 수목원'으로 향했다.


일반인에게 생소한 그곳은 가요 '님은 먼 곳에'를 불렀던 왕년의 인기가수 '김추자'의 할아버지이자, 강원도에서 가장 크게 기미독립만세운동을 했던 의사 김원덕 선생의 자손이 오랜 기간 가꾸어 왔는데, 규모가 그리 크지 않지만 무료입장이라 더욱 친근감이 들었다.


빈 넓은 주차장에서 입구로 올라가니 족히 7~8미터쯤 되는 화강암 광개토왕비(보급품)가 우뚝 서 있었고, 그에 못지않은 발해 석등을 보면서 이렇게 커다란 바위 덩어리를 도대체 어디서 구해 이곳까지 운반했는지 자못 궁금했다.


더구나 노래비, 송덕비, 기념비 등 수십 개의 다양한 비석은 소나무와 잣나무 숲으로 제법 고풍스럽게 꾸며진 산책로를 따라 곳곳에 보기 좋게 놓여있어 시선을 끌었다.


지금 겨울이라 연분홍 철쭉이 만발한 멋진 모습을 볼 수는 없었지만, 청춘남녀가 손을 잡고 데이트하고 싶은 아기자기한 오솔길 분위기가 좋았고, 특히 전망대에서 내려다보이는 내촌천과 이웃마을 풍경은 이곳의 자랑이었다.


나는 L과 수목원을 거닐며 한때 5개 국어를 구사하며, 해외시장을 주름잡았던 젊은 시절의 그를 회상해 보았다.


아직 젊은이 못지않은 체력이 있고, 남다른 능력도 있지만, 안타깝게도 세상은 그를 받아주지 않았다.


그래서 새로운 인생을 설계하며 선택한 귀농은 결코 쉬운 일이 아니지만, 분명히 그는 배려, 신뢰, 성실 그리고 노력을 주 무기로 다시 한번 도약할 것이다.


서울에 있는 가족과 떨어져 이곳에서 혼자 자취하며 귀농교육을 받았고, 차후 상호 도움이 될 교육생들과 좋은 유대관계를 맺으며, 예비농부로 재탄생한 그에게 힘찬 박수를 보낸다.


그와 헤어진 후에 서울로 향하는 차속에서 '올해는 코로나 때문에'를 외치면서 보낸 허송세월을 생각하니 그냥 웃음이 나온다.


헛! 헛! 헛!


글쓴이. 서치펌 싱크탱크 대표 이규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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