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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규선 Sep 13. 2021

국화 옆에서


작년에 뇌졸중을 겪었고, 올 초에는 백내장 수술도 받았는데 아직도 눈이 침침하고 기력이 없어!"

올해 팔순이신 사촌누님에게 지난주 안부전화를 드리면서 들은 얘기였다.

얼마 전에 모친과 얘기를 나누다가 누님이 최근에 실버타운에 들어갔다는 소식을 듣고 확인해 보니 내가 잘 알고 있는, 고려대 가까이 있는 '노블레스타워'(대표 한문희)였다.

중학교 동창인 한 사장은 10여 년 전에 그곳에 도시형 실버타운을 만들다가 온천이 터져 대박이 났고, 지금은 강원도 철원에 노블레스 파크까지 추진하고 있는 전형적인 사업가다.

노블레스타워를 오픈했을 때 그 당시 해외 콩쿠르에서 우승한 바리톤 성악가가 무대에서 노래를 불렀고, 그 후 내 아들과 주말마다 몇 차례 온천사우나를 즐겼던 기억이 생생하다.

그 실버타운을 한동안 잊고 지내다가 입주한 누님을 만나고자 미리 전화드렸고, 오늘 모친과 두 분 고모님을 모시고 방문했다.

이왕 가는 김에 한 사장을 보려고 오랜만에 전화했으나, 가는 날이 장날이라 철원으로 출장 간다고 하여 아쉬웠다.

다들 코로나가 걱정되는 노인들이지만, 몇 살 차이가 나지 않은 친구 같은 조카가 요즘 건강이 어떤지, 또 실버타운이 과연 어떤 곳인지 궁금해서 찾아간 것이다.

250세대 남짓 거주하는 실버타운이라 입구부터 철저하게 발열체크, 손세정, 그리고 각 방문자 명단 작성까지 이중, 삼중으로 확인한 후에 들어가니 기타, 드럼 그리고 피아노가 갖춰진 제법 큰 공연장이 나왔다.

엘리베이터를 타고 올라가니 족히 100미터는 될 정도로 곧게 뻗은 복도는 양쪽으로 긴 안전바가 없다면 특급호텔 그 자체였다.

누님이 거주하는 34평은 방이 2개 있는데 혼자 살기에는 넓었고, 동남향이라 햇볕이 따뜻해 겨울에 난방이 필요 없을 것 같았다.

매일 메뉴가 바뀌는 식당이 지하에 있지만 다른 분들에게 피해를 줄까 봐 가지 않았고, 누님이 차려준 꽃등심, 홍어회 등을 맛있게 먹었다.

그리고 식후에 디저트로 커피를 마시며 왜 이곳에 왔는지, 관리비용은 얼마인지, 어떤 편의시설이 있는지 등 궁금한 것들을 죄다 물어보았다.

입주한 지 얼마 되지 않아 제대로 파악을 못했다는 누님이지만 영양식으로 꾸며진 식사가 제일 좋고, 노인이 신경 쓰지 않을 정도로 완벽하게 잘 운영되어 있는 시설에 매우 흡족한 모습이었다.

우리는 옥상에 올라가 푸른 인조잔디에서 한 무리의 노인들이 게이트볼을 하는 광경을 보았고, 양지바른 곳에서 할머니 몇 분이 나란히 앉아 멀리 북한산을 바라보며 대화를 나누는 모습을 보니 정겨웠다.

과거 몇 차례 방문한 기억을 되살려 나는 노블레스타워 홍보대사 인양 지하 2층부터 1층 로비까지 영화관, 사우나장, 수영장, 골프장, 식당, 종교시설 그리고 물리치료실 등 의료시설까지 두루 들어가 보거나 쳐다보며 안내했다.

우리는 지하 인공폭포 앞에서, 또 거대한 황소상이 있는 본관 정문 등 포토존에서 기념사진을 찍은 후에 작별인사를 나눴다.

자식농사를 잘 한 덕분에 매달 적지 않은 비용을 지불하며 호강하는 누님이 부러운 듯해서 집으로 돌아가는 길에 모친께 물어보니 모든 게 편해 게을러지기 쉬워 아직은 그리 달갑지 않다고 하셨다.

독립문 영천시장 옆 경사진 언덕길 기와집에 살던 누님 집이 내가 어렸을 때 살던 북아현동 집에서 가까워 가끔 놀러 갔다.

그 당시 우리 집은 흑백 TV가 있었는데, 누님 집의 유일한 가전제품이었던 미국산 제니스 라디오의 앞면이 불에 녹아 일부 찌그러진 것을 보고 충격을 받았다.

누님은 15년 전에 암으로 돌아가신 이발사 매형과 모진 가난을 극복하며 딸은 공무원으로, 아들은 종합병원장으로 키우느라 고생하셨다.

독실한 크리스천인 누님은 수년 전만 해도 주름 하나 없던 통통한 얼굴이었는데, 크게 아프고 나서 지금은 허리가 굽어지고 몸도 성한 곳이 없다고 하신다.

힘든 인생을 사신 누님이 지금이라도 노후를 편하게 보낼 수 있어서 정말 다행이다.

누님만 보면 항상 떠오르는 시가 있어 학창 시절을 추억하며 다시 한번 읊어본다.

국화 옆에서 (서정주)

한 송이의 국화꽃을 피우기 위해

봄부터 소쪽새는

그렇게 울었나 보다.

한 송이의 국화꽃을 피우기 위해

천둥은 먹구름 속에서

또 그렇게 울었나 보다.

그립고 아쉬움에 가슴 조이던

먼 젊음의 뒤안길에서

인제는 돌아와 거울 앞에 선

내 누님같이 생긴 꽃이여.

노란 네 꽃잎이 피려고

간밤엔 무서리가 저리 내리고

내게는 잠도 오지 않았나 보다

글쓴이: 서치펌 싱크탱크 대표 이규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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