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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규선 Sep 13. 2021

굴레방다리

내가 학창시절 대부분을 보낸 곳이 굴레방다리로 불리는 서울 서대문구 북아현동, 지금 아현감리교회 뒷동네다.


을지로 입구에 있던 청계초등학교가 5학년 말에 도심공동화로 폐쇄된 후, 남산초등학교에 잠깐 있다가 5학년 말에 아현초등학교로 전학해 직장다닐 때까지 15년 가까이 살았다.


어릴 때 청계천 판잣집에 살다가 북아현동 3층 양옥집으로 이사가니 대궐이었고, 옥상에 올라가 동네주변을 내려다보며 노는 것이 커다란 낙이었다.


그 당시 부친은 집은 샀지만 자금사정이 좋지않아서 1층을 통째로 전세주었고, 2층에 우리가 살았다.


2층도 마루를 가운데 두고 큰 방은 우리 가족 5명이, 작은 방에도 다른 가족 4명이 살았다.


작은 방에는 같은 학교 5학년 동기인 C가 있었는데 뭐가 그리 부끄럽다고 처음에는 서로 말도 안하고 쪽지로 주고받아 지금 생각해도 웃음이 나온다.


경희대 한의과를 나와 현재 한의사로 일하는 C와는 지금도 가족끼리 만나며 교류하고 있다.


그 당시 그의 큰누님은 이화여대 수학과를 다녔고, 큰형은 한국인으로 유일하게 화교중학교에 다니다가 왕따를 당해 정신병원에 입원해 내가 대학시절에 처음 봤으며, 두살 위 작은 형은 검정고시로 18세에 서울대 물리학과에 합격한 수재로 현재 대학교수다.


한마디로 머리가 좋은 집안이었고, 지금은 꿈도 꾸지못할 개천에서 용이 난 것이었다.


내가 중3 때 1층으로 내려와 처음으로 내 방을 가졌고, 반평이 안되는 목욕탕에서 때를 씻는 날은 우리집 하수구가 막히는 날이었다.


우리 집에서 정면으로 쳐다보이는 언덕끝 작은 연립주택에 친구 K가 살았는데, 축구를 잘해 아현초등학교의 영웅이었다.  


그는 직장생활내내 축구동호회에 주전으로 뛰었는데, 무릎이 혹사되어 수년 전에 아차산에도 못올라가 가슴이 아팠다.


우리 셋은 과거 고아원이었던, 넓지만 허름한 공터에서 축구를 하였고, 처음 야구글러브를 산 후에 이웃동네 아이들과 시합도 하였다.


C가 모래내(남가좌동)로 이사간 후에도 우리 셋은 삼총사가 되어 자주 만나며 무난히 사춘기를 보냈다.


4살 아래인 내 남동생은 하루종일 뛰어놀다가 흙투성이가 되어 오곤했는데, 어느 날 동네 형에게 맞았다고 엉엉 울며 집으로 들어왔다.


나는 그애를 혼내주려 나갔는데, 나보다 한살 위인 중1선배가 나를 보더니 순식간에 얼굴을 강타하는 바람에 코피가 터져 망신당했다.


길건너 앞집에는 우리와 똑같은 연배인 2남1녀 S남매(아들,아들,딸)가 살았는데, 모두 하얀 피부에 눈이 컸고 속눈썹마저 길어 마치 서양인형같아 부러웠다.


한때는 수년 간 우리집 옥상에 가죽지갑과 벨트를 만드는 공장을 운영해서 4~5명 직원이 있었고, 그것을 일부 동네 사람들에게 하청을 줘 물건나르는 일은 내가 맡았다.


처음 양옥집으로 이사했을 때 TV가 없어서 동네 만화방에서 돈을 주고 보다가, 그것을 샀을 때 얼마나 기뻤는지 동생과 남진의 히트곡을 부르며 개다리춤을 추었던 기억이 아직도 생생하다.


한때는 경기도 판교에서 살던 사촌들이 우리 집에서 직장을 다녔는데, 큰누나가 연탄가스에 중독되어 그 당시 효과가 있던 동치미 국물을 먹였는데도 반응이 없어 병원에 실려갔던 적이 있었다.


작은 누나는 맞벌이인 우리 부모님을 대신해 몇년간 어린 우리 남매를 돌보다가 26살에 결혼했는데, 큰딸이 판사이고, 변리사 사위를 얻어 지금은 행복한 노후를 보내고 있다. 


나는 중3 때 친구C의 소개로 광화문에 있는 S교회를 다녔고, 그 인연으로 지금까지 수십년 동안 그 교회 친구들과 매월 만나며 우정을 다지고 있다.


결혼 후에 나는 북아현동에서 가까운 충정로에 신혼집을 얻었고, 내 남동생은 잘 나가던 직장을 나와 사업 초창기에 북아현동과 충정로를 전전하며 사무실을 오픈해 북아현동 시절의 향수에서 크게 벗어나지 않았다.


~~~~~


얼마 전 겨울을 재촉하는 보슬비가 오던 날 오후에 아현동 가구거리에 인접해 있는 옛동네가 어떻게 변했는지 궁금해 방문했다.


우리가 살던 양옥집 1층은 방앗간으로 변해 전혀 자취를 찾을 수 없었으나, 2층과 3층 옥상은 멀리서 봐도 그대로였다.


장난치며 뛰어놀던 어린 시절부터, 하얀 단복을 입던 ROTC후보생 시절 막걸리 몇사발에 꽐라되어 흙바닥을 뒹굴었던, 그 골목은 어른 두명이 나란히 팔을 뻗으면 닿는 좁은 골목이어서 놀랐다. 


더욱 놀라운 것은 친구 K의 모친이 얼마 전까지 혼자 살다 돌아가신 언덕모퉁이 작은 연립주택은 

50년 전 그대로였고, 무너질 듯 너무 허름해서 가슴이 뭉클했다. 


이제 나이를 먹으며 지난 추억을 더듬어 보니, 양옥집에서 살던 그 학창시절은 나에게는 조흔파의 얄개시대였고, 한편의 청춘드라마였다.


그곳에서 나약한 꼬마가 중,고등학생이 되었고, 대학을 졸업하고 육군장교로 예편하였으며, 대기업에 취직해 당당히 사회인이 되었다.


또한 그곳에서 한의사, 대학교수, 사업가를 배출했으며, 의사와 판사 조카들까지 줄지어 나왔다.


글을 쓰다보니, 서둘러 아침밥을 먹고있는데 친구 K와 C가 우리집 대문을 두드리는 소리가 들려오는 것 같다.


''규선아!  학교가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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