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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규선 Sep 13. 2021

왕의 능을 걷다


"오월은 푸르구나. 우리들은 자란다. 오늘은 어린이날 우리들 세상!"


어렸을 적에 어린이날이라면 몇 주일 전부터 들떠 기다렸지만, 우리 아이들도 성인이 되어 하루 푹 쉬는 그런 휴일이 된 지 오래되었다.


그래도 그냥 보내기는 뭣 해서 올림픽공원에 있는 V레스토랑에서 가족과 샐러드를 먹으며 아침을 시작했다.


그런데 식사가 느린 편인데, 우유, 요구르트, 토마토를 먹어서 그런지 가스가 차서 갑자기 올챙이배가 되었고, 살짝 몸살 기운도 있었다.


식사 후에 집에서 쉴까 생각하다가, 어렵게 오늘 일정을 잡았는데 포기할 수 없어 아내가 제안한 대로 동구릉으로 차를 몰았다.


조선왕실 최대 규모의 왕릉 군으로 유네스코 세계유산으로 지정된 동구릉은 500년이 넘는 왕조의 무덤으로 이처럼 온전하게 보존되어 있는 것은 세계에서 유례를 찾기 힘들며 문화사적 가치가 높다고 한다.


우리는 관람코스를 따라 동구릉을 산보했고, 마치 서당 학생들처럼 이것은 홍살문, 저것은 향로와 어로, 그리고 정자각과 능침까지 확인하였고, 특히 태조 이성계의 건원릉에 이르러 봉분에 억새풀을 심은 사연까지 얘기를 나눴다.


또 이성계의 이복동생으로 조선 개국 공신인 '이화'(의안대군)가 조카인 이방원(태종)의 1차, 2차 왕자의 난에도 불구하고 끝까지 의리를 지킨 우리 조상임을 자랑스럽게 내세우며 태조의 건원릉을 바라봤다.


작년 가을에 남양주 홍유릉(고종과 명성황후의 능) 바로 옆에 인접한 의친왕과 덕혜옹주의 묘 주변을 걸었을 때 구비구비 돌아가는 오솔길이 특이해 마치 과거를 보러 가는 선비들이 걷던 숲길 같았다.


그런데 동구릉은 울창한 소나무 숲 아래에 시냇물이 흘러 더 운치 있고, 종로구 부암동에 있는 백사실계곡 보다 수량(水量)이 더 풍부했으며, 벤치에 누워 지저귀는 새소리를 들으면 힐링할 것 같은 분위기가 너무 좋았다.


휘릉에서 원릉, 그리고 경릉 양묘장 숲길이 코로나로 접근금지라 아쉬웠지만, 혜릉에서 공사 중인 숭릉과 연지(蓮池)까지 왕복 1km 남짓 사람이 없어 한적한 길은 딴 세상이었다.


거기에 파란 하늘, 연둣빛 능, 적갈색 정자각, 그리고 마치 골프장같이 잘 다듬어진 잔디밭과 주변의 푸른 숲이 줄을 그은 듯 선명하고 아름다워 어느 누가 찍어도 작품사진이 될 것 같았다.


예전에 찍고 나면 점점 더 멋있는 장소가 나타나 몇 장 남지 않은 카메라 필름 때문에 당황했던 기억이 나지만, 오늘은 프로 사진작가 인양 가다 서기를 반복하며 포토존에서는 온갖 구도를 잡아가며 열심히 찍었다.


동구릉에 들어섰을 때 입구에 있는 화장실을 갈까 하다가 더부룩한 배를 두드리며 걸었는데, 조상님의 은혜 덕분인지 어느새 나아졌고, 두 시간 남짓 만보를 걸었다.


서울과 경기도에 있는 조선왕릉은 거의 다 가봤지만, 동구릉은 무척 넓고, 나에게는 교통편이 좋으며, 9곳 능마다 조금씩 다른 관람 포인트에 맞춰 또한 사계절마다 보는 느낌이 달라 더 찾게 된다.


오늘은 휴일이라 평소보다 2~3배 방문객이 많았지만, 전혀 부담되지 않았고, 코로나로 집콕하지 말고 누구나 천 원(입장료)의 행복을 느끼라며 권하고 싶다.


돌아오는 길에 이문안 호수공원 옆에 있는 '봄여름 가을 겨울' 카페에 들려 햇볕 따뜻한 창가에 앉아 시원한 아메리카노를 마셨다.


그런데 왕처럼 품위 있게 혹은 선비나 서당 학생처럼 짚신을 신고 동구릉 이곳저곳을 돌아다녔고, 잘 부탁한다며 늙은 능참봉에게 작별인사를 드린 지 1시간도 안된 것 같은데, 적어도 120년 넘는 세월이 훌쩍 지나갔다.


"아!  이게 꿈인가, 생시인가!"


나는 가끔 먼 옛날로 돌아가고 싶은 생각도 한다.


글쓴이, 서치펌 싱크탱크 대표 이규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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