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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규선 Sep 13. 2021

고랑포 이야기

 

"오늘 점심 약속이 있나요? "


전 직장 동료들 혹은 동네 아줌마들과 약속이 있어 가끔 외출하는 아내에게 슬쩍 물어보니 코로나 때문에 당분간 계획이 없다고 하였다.


담요를 뒤집어쓴 채 소파에 비스듬히 기대앉아 TV 리모컨을 조작하던 아내는 "그럼 드라이브 하자!"는 내 얘기에 솔깃하더니 잠시 머뭇거렸다.


날씨는 좋아 나가고 싶지만 사람들 만나기를 주저하는 그녀의 모습을 보고, 나는 얼른 옷을 갈아입은 후에 차에서 기다리겠다고 하니 몇 분 안되어 따라 나왔다.


나는 집콕하느라 답답한 마음을 떨치고, 아내와 모처럼 외식을 한 후, 분위기 좋은 곳에서 커피 한잔 하고 싶었다.


그래서 무작정 떠났고, 우리는 30분도 안되어 포천에 있는 단골 샤부샤부 집에 도착했다.


식사를 하면서 생각해 보니, 그동안 몇 차례 갔던 포천, 동두천, 파주 코스를 벗어나 이번에는 안 가본 곳을 여행하는 것이 좋겠다고 선택한 곳이 '고랑포구'였다.


그곳은 내가 1사단 파주지역에서 군 복무했을 때 인근 25사단 관할지역으로 지명이 정감 있어 가보고 싶었는데, 얼마 전에 우연히 인터넷을 검색하다가 발견한 곳이 카페 '고랑포 이야기'었다.


고속도로와 국도를 타고 얼마쯤 갔을까, 3km 전방에 감악산 출렁다리가 있다는 안내판이 보여, 이곳까지 왔으니 이왕이면 체력단련을 할 겸해서 감악산으로 차를 돌렸다.


2년 전에 처음 왔을 때 다리 입구에는 아담한 카페밖에 없었는데, 그 옆 넓은 주차장은 지금 모두 식당가로 탈바꿈하였다.


감악산 출렁다리는 파주 마장 호수 출렁다리와 비견될 정도는 아니었지만, 150미터의 긴 다리 중간쯤 가다가 수십 미터 아래 계곡을 내려다보니 가슴이 뭉클했고, 원주 소금산 출렁다리 보다 교통편과 접근성이 좋고, 10분 정도면 올라가 남녀노소 체력 부담이 없는 곳이었다.


이번에 처음으로 범륜사 밑에 있는 운계 폭포를 봤는데 가물어 힘없이 내려오는 물줄기가 아쉬워, 전망대에서 잠시나마 여름 장마 때 30미터 높이에서 직하하는 웅장한 폭포를 상상해 보았다.


그곳에서 야간에 병풍처럼 두른 절벽과 폭포를 배경으로 증강현실을 더하는 라이팅쇼를 한다는 광고를 보았다.


칠흑같이 어두운 밤에 산을 올라가는 것도 무섭지만, 깊은 숲 속에서 갑자기 붉은 용이 나타나 꿈틀대다가 힘차게 오르내리는 모습을 생각하니 소름이 끼쳤다.


그런데 그런 이색적인 장소에서 역동적이고, 환상적인 색채의 향연은 감악산의 또 다른 볼거리이며, 누구에게나 멋진 추억이 될 것이라고 생각한다.


우리는 때마침 5일장을 하는 적성 전통시장을 지나 도착한 곳은 연천에 있는 고랑포구 역사공원이었다.


고랑포구는 삼국시대부터 고구려, 신라, 백제의 전략요충지로 임진강을 통한 물자교류 중심 역할을 했던 나루터였고, 1968년 1월 김신조 등 무장공비 침투로였다.


우리는 역사공원 전시장에서 이곳이 1930년대 화신백화점의 분점이 자리 잡을 정도로 번성했다는 얘기를 처음 접했고, 각종 시청각 자료를 통해 역사, 문화, 안보를 체험해 볼 수 있었다.


이윽고 최종 목적지인 임진강이 바로 내려다보이는 '고랑포 이야기' 카페에 들어갔다.


마음씨 좋게 생긴 주인아저씨는 코로나 2단계 발령이라 실내에 머물 수 없다며 우리를 장 잣불이 있는, 운치 있는 장소로 안내하였다.


날이 쌀쌀해 서성거리니 모포를 꺼내 주셔서, 우리는 화로에 둘러앉아 속세를 떠난 듯이 따뜻한 커피를 마시며 잠시 불멍을 하였다.


아! 이게 얼마만인가!


자연스레 이효석의 '낙엽을 태우면서' 수필이 떠올랐고, 학창 시절 즐겨 불렀던 박인희의 '모닥불' 노래가 귓가에 들리는 듯했다.


모닥불 피워놓고 마주 앉아서

우리들의 이야기는

끝이 없어라

인생은 연기 속에 재를 남기고

말없이 사라지는

모닥불 같은 것

타다가 꺼지는 그 순간까지

우리들의 이야기는

끝이 없어라


살랑살랑 바람 따라 불어오는 매캐한 연기를 피해 나는 자리를 옮겨, 말없이 불을 지피는 주인장 옆에 앉았다.


내 또래로 보이는 그에게 나는 고즈넉한 카페 분위기가 좋다고 넌지시 말을 건네며 언제 카페를 오픈했는지, 왜 이곳까지 왔는지 등 궁금한 점을 물어보았다.


얼마 있으니 60대 중반으로 보이는 또 다른 부부가 함께하여 우리는 모닥불을 쬐며 모두 구면 인양 재미있게 얘기하느라 시간 가는 줄 몰랐다.


주인 부부는 일산에 살다가 10년 전에 이곳에 500평 땅을 샀고, 아이들이 분가한 후에 노후에 편안하게 전원생활을 하려고 5년 전에 집을 지었다고 한다.


그런데 처음 1~2년은 주말마다 친구들을 불러 파티를 하며 즐겁게 지냈는데, 시간이 지나면서 피곤해 옆에 조그맣게 카페를 차렸는데 주말에 손님들로 붐벼 처음 의도와는 달라 고민 중이라고 한다.


나는 아직 젊으니 힘닿는 데까지 일하다가 나중에 농작물이나 키우면서 사시는 것이 좋겠다며 조언하였다.


늦가을이라 금세 어둑어둑해져 경순왕릉과 호로고루성지는 못 갔지만, 고속도로를 쏜살같이 달려 1시간 20분 만에 집에 도착하니 딴 세상에서 온 것 같았다.


왜냐하면 고랑포구는 민통선 인근이라 그냥 가기에는 먼 거리였고, 김신조 일당 때문에 그 당시 매설했던 지뢰를 제거하는 현장을 카페에서 지켜보았으며, 임진강으로 내려가는 포구는 철조망으로 가로막은 모습을 조금 전까지 내 눈으로 보았기 때문이다.


차가운 시골 공기를 마시며, 하늘을 일렬로 날아가는 새들을 가끔 쳐다보고, 상호 그대로 무척 이야깃거리가 많을 것 같은 임진강변 노천카페에서 느낀 쓸쓸하면서도 낭만적인 분위기는 평생 잊지 못할 것 같다.


코로나가 종식된 화창한 봄날, 나는 다정다감한 주인장의 마스크를 쓰지 않는 선한 얼굴을 마주하며 인생 후반기 이야기를 부담 없이 나누고 싶다.


글쓴이: 서치펌 싱크탱크 대표 이규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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