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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규선 Sep 13. 2021

와수리를 가본 적이 있나요?


과거 임꺽정의 전설로 유명한 고석정은 몇 번 가보았지만, 같은 강원도 철원지역 와수리는 처음이었다.


6.25 때 철의 삼각지대로 유명한 '김화 전투지역'에 인접한 와수리는 건강한 대한민국 남자라면 한때 피와 땀을 흘리며 국방의 의무를 다했던, 평생 잊지 못할 추억의 장소였다.


~~~~~


토요일은 늘 약속이 있었는데 오늘은 일정에 차질이 있어 집에서 빈둥빈둥 보낼 것 같아 가까이 사는 몇 친구에게 연락하니 다들 선약이 있었다.


마땅히 동행할 사람이 없어, 무엇을 할까 고민하다가 무턱대고 동서울터미널에 갔고, 한 번도 가보지 못한 '와수리'가는 버스에 올랐다.


때마침 비가 왔고, 강변 테크노마트를 돌아 진입한  의정부 방향 고속도로는 놀러 가는 차들로 이미 주차장이 되었다.


이럴 땐 책을 보는 것이 상책이라 생각해, 지난주 몇 장 읽다 말은 책을 꺼내 다시 읽기 시작했다.


10여분 되었을까, 버스가 제법 속도를 내기 시작할 때 책을 덮었다.


정치에 관련 책이라 재미가 없었고, 흔들리는 차 안에서 책을 읽는 것은 무리였다.


즉시 이어폰을 귀에 꽂고, 창밖을 보니 다행히 비가 그쳤다.


멀리 짙푸른 산과 들을 쳐다보니 침침했던 눈이 시원했고, 군동기들에게서 수 없이 들었던 와수리를 간다고 생각하니 살짝 흥분되었다.


여행을 좋아하는 나는 먼 곳에 갈 때는 자가용보다는 대체로 기차와 버스를 이용한다.


비용을 절약하고, 육체적, 정신적인 피로감도 적지만, 높은 창가에서 아래를 내려다보는 느낌이 그만이다.


내가 좋아하는 가곡을 들으며 여행하니 순간적으로 이것이 행복이구나 하는 생각이 스쳤고, 노래 가사를 음미하니 주마등처럼 지나간 옛 추억이 줄줄이 사탕처럼 생각났다.


특히 '망향'을 부른 소프라노 김학남 교수의 목소리는 고교시절 서울예고출신인 K와 거의 흡사하여 깜짝 놀랐고, 나를 까까머리 그때로 돌아가게 했다.


서정적이면서 하늘을 찌를 것 같았던 고음으로 나를 소름 끼치게 했던 그녀는 지금 멀리 미국 LA에 있는, 내 사촌과 같은 교회를 다니고 있다.


20여 년 전에 미국에 갔을 때, 주일날 아침 나는 예배당 앞줄 한가운데 앉았다.


연단 앞에서 열심히 찬송하던 솔리스트인 그녀가 무심코 나를 본 순간, 당황하며 표정 관리했던 모습이 지금도 생생하다.


예배를 마친 후에, 그녀는 반가워 어쩔 줄 몰랐고 커피를 같이 하면서 한국에 있는 친구들의 동향을 물었다.


언젠가 또 내가 중남미에 출장을 갔을 때, 그녀는 미국 LA공항까지 마중 나와 주었다.


그때 그녀는 친구들을 위해 선물을 준비했고, 나는 첫 출발지인 LA부터 무거운 가방을 들고 3주일가량 브라질, 아르헨티나 등 8개국을 돌아다녔다.


그녀를 생각하면 할수록 젊은 시절 그녀의 잘못된 선택이 아니었다면 조수미와 어깨를 겨룰만한 세계적인 성악가가 되었을 것이어서 지금도 가슴이 아프다.


젊은 날의 추억들은 한갓 헛된 꿈이라!

윤기 흐르던 머리  이젠 다시없어라!

오 내 사랑하는 님 내 님 그대 사랑 변찮아!

지난날을 더듬어 은발 내게 남으리!  

(가곡 '은발' 가사)


최근 3년마다 그녀가 방한했을 때 나는 친구들을 불러모았고, 우리는 2~3대 차를 나누어 타고 경주, 울산, 그리고 강원도 정선 등을 여행했다.


또한 학창 시절 다녔던 교회도 가보았고, 광화문 일대와 덕수궁 돌담길을 걸었으며, 고교시절 성가대 지휘자 선생님도 초대해서 지난 추억을 더듬으며 즐거운 시간을 보냈다.


어릴 적부터 즐겼던 노래를 듣다 보니 어느새 말로만 듣던 와수리에 도착했다.


와수리는 도보로 10분이면 돌아볼 수 있는 자그마한 군사지역인데, 5년 전부터 과거 화려했던 모습은 자취를 감췄다며 마음씨 좋아 보이는 커피숖 주인이 얘기하였다.


부모님께 큰절하고, 친구들과 입영전야를 부른 후에 다시는 돌아오지 못할 것처럼 떠났던 군대생활은 수십 년 전에 끝났고, 내 늦둥이 아들도 예비역이 되었다.


오늘 왕복 4시간의 버스여행은 꿈 많던 고교시절과 나의 ROTC 군대 시절을 되새겨 준 멋진 추억여행이었다.


거기에, 싱싱 달리는 시원한 버스에서 비가 갠 후의 깨끗한 하늘, 그리고 푸른 숲과 들판을 쳐다보는 즐거움은 덤이었다.


글쓴이  서치펌 싱크탱크 대표 이규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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