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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규선 Sep 13. 2021

브로망스

어제 대학 친구 S와 둘이서 인왕산 둘레길과 정동길을 걸었다.

모처럼 포근하고, 미세먼지도 없어 아침 10시 독립문역에는 이미 중장년의 등산객들 수십 명이 옹기종기 모여 있었다.


우리는 무악재 하늘다리를 건너, 해골같이 기괴하게 생긴 선바위(인왕사)에서 잠시 쉬다가, 인왕산 중턱을 하얗게 둘러쌓은 성곽길을 돌았다.


그리고 한국사회과학 자료원을 옆에 끼고, 아직도 남아있는 몇몇 일본식 적산가옥을 쳐다본 후에, 경희궁 자이 아파트 방향으로 내려오니 바로 앞에 프로축구협회가 보였다.


아뿔싸!


계획한 대로 홍난파 가옥과 딜쿠샤 건물을 보려고 내려왔는데, 좁은 골목을 이리저리 걷다 보니 엉뚱한 방향으로 나왔고, 지도로 확인해 보니 왔던 길을 되돌아가야 했기에 포기하고 고즈넉한 경희궁길로 들어왔다.


예나 지금이나 조용하고 수려해 보이는, 이곳 동네 한복판에 있는 성곡미술관과 아기자기한 예쁜 카페를 쳐다보며 우리는 60 평생을 살아온 다양한 얘기를 나누었다.


봄이 오면 산에 들에 진달래 피네

진달래 피는 곳에 내 마음도 피어

~~      ~~    ~~


아까 인왕산 성곽길을 내려왔을 때 큰 나무에 가려진 매화를 보고 살짝 봄을 느꼈지만, 카페에 앉아 사랑을 나누는 청춘남녀들의 발랄한 대화와 그들의 화려한 옷차림을 보니 정말 봄이 왔음을 실감할 수 있었다.


서울역사박물관에서는 딜쿠샤 전시회가 열려 그의 자손이 기증한 자료를 유심히 쳐다보니 성곽길에서 길을 잃어 가보지 못한 딜쿠샤에 대한 아쉬움을 만회할 수 있었고, 소중한 역사적인 사실을 더욱 접할 수 있어 좋았다.  


마지막 고교시험 세대였던 S는 경희궁에 들어와 그의 모교였던 서울고 시절을 떠올리며, 이곳은 교실, 저곳은 운동장, 도서관, 하물며 강재구 소령 동상 자리까지 손으로 가리키며 추억에 잠겼다.


우리는 정동길에 접어들어 그 당시 유명했던 레스토랑인 이따리아노에 얽힌 사연을 얘기했고,

슬픈 역사를 지닌 고종의 길을 묵묵히 걸었으며, 영국대사관과 아름다운 주황색 성공회 건물을 흘깃 쳐다본 후에 무교동으로 들어왔다.


가만히 생각해보면, 브로망스처럼 S와 나는 여러 가지로 비슷한 점이 많고 남다르게 인연도 깊다.


풋풋한 대학시절, 내가 맨 처음에  S를 봤을 때 눈과 코가 커서 혼혈인이라 생각했고, 파스텔톤의 환한 콤비를 늘 입고 다녀 유복한 집안의 자식으로 기억했다.


그의 부친은 젊은 시절 돈을 많이 벌어 학생 때 그는 밍크코트를 입고 다닌 이른바 금수저였는데, 고교 1년 때 부친이 돌아가셔서 방황했다고 한다.


아무튼 그와 나는 그 당시 재계 11,12위 했던 K그룹에 들어갔고, 그가 과장으로 승진한 후에 늦장가를 갔을 때 내가 여의도 전경련회관에서 결혼식 사회도 보았다.


그는 부장 시절 K그룹에서 실력을 인정받아, 한 번도 받기 힘든 그룹 회장상을 두 번씩이나 받았고, 어느 날 아침 주요 일간지에 상금으로 받은 돈다발을 한 아름 들며 대서특필되었던 보기 드문 인재였다.


또한 키와 몸무게, 하물며 식성과 성격까지 비슷해 서로 대화를 나누다 보면 맞장구치는 일이 많아 시간 가는 줄 모른다.  


지난달 모임 때는 5명이 모여 낙산 둘레길, 동대문 DDP와 청계천을 걷고 나서 광장시장에서 빈대떡과 파전을 먹으며 즐거운 시간을 보냈는데, 이렇게 호흡이 맞는 친구라면 둘이서 어디에 간들 뭐 그리 중요하랴!


무교동 아크 앤 북에서 S와 따뜻한 커피를 마시며 16000보를 걸은 오늘의 피로를 푸니, 최근에 어느 밴드에서 따온 다산 정약용 선생의 '인간 삼락(人間三樂)'이 떠오른다.


어렸을 때 뛰놀던 곳에 어른이 되어 오는 것,

가난하고 궁색할 때 지나던 곳을 출세해 오는 것,

나 혼자 외롭게 찾던 곳을 마음 맞는 좋은 벗들과 어울려 오는 것.


여러분이 생각하는人間三樂은 무엇인지요?


글쓴이  서치펌 싱크탱크 대표 이규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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