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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규선 Sep 13. 2021

우리 학교가 사라지다니


폐교를 앞둔 부산의 어느 초등학교의 눈물의 졸업식 사진이 오늘 아침 중앙일보 1면에 나왔다.


곳곳에서 학생들이 얼굴을 감싸며 울음을 터트렸는데, 이날이 이 학교의 마지막 졸업식이기 때문이다.


학생수가 갈수록 줄어 폐교가 결정되어 졸업생 15명을 끝으로 문을 닫고, 나머지 학생들은 인근 타학교로 전학한다.


이 사진을 보니 아이들이 얼마나 슬펐을까 나도 동병상련이 되었다.


내가 서울 중구 을지로 입구에 있는 청계 국민학교를 다녔을 때 비슷한 경험을 했다.


1. 빛나는 졸업장을 타신 언니께 꽃다발을 한 아름 선사합니다. 물려받은 책으로 공부를 하여 우리들은 언니 뒤를 따르렵니다.


2. 잘 있거라 아우들아 정든 교실아 선생님 저희들은 물러갑니다. 부지런히 더 배우고 얼른 자라서 새나라의 새 일꾼이 되겠습니다.


3. 앞에서 끌어주고 뒤에서 밀며 우리나라 짊어지고 나갈 우리들.  냇물이 바다에서 서로 만나듯 우리들도 이다음에 다시 만나세


그 당시 나는 크시코스의 우편마차 등을 부른 청계 국민학교 합창단원이었고, 선배들의 졸업식을 대비해서 이 노래를 하도 불러 지금도 기억하고 있다.


요즘 아이들은 졸업식 때 이 노래를 부르는지 모르겠지만, 한 줄 한 줄 뜻깊은 가사를 음미하며 부르면 지금도 코끝이 찡하다.


1960년대 서울에도 인구 공동화 현상이 일어나, 시내 한복판, 그 당시도 화려했던 명동 옆에 있던, 우리 학교가 남대문, 방산 국민학교 등과 함께 폐교되어 나는 5학년 말에 집 가까이에 있는 남산 국민학교로 전학하였다.


그때 학생수가 1만 명이 넘어 2부제, 3부제 수업을 하는 미동 국민학교, 종암 국민학교와는 달리 우리 학교는 전교생이 680명이어서 각 학년당 2개 반으로 단출했다.


우리 학교가 폐교되는 날, 1년 위의 선배들은 졸업도 못하고 재학생, 선생님 할 것 없이 서로 부둥켜안고 울었다.


그때 할아버지 같이 늙으신 교장선생님이 안경을 벗고 손수건으로 연실 얼굴을 닦아가며 우는 모습은 지금도 생생하다.


그 후에 그분이 남산 국민학교 교장선생님으로 다시 오셨을 때 얼마나 기뻤던가!


옛날에는 학생들이 많아 하나 낳기 운동을 했는데,  지금은 거꾸로 저출산으로 인구가 현격하게 감소해 정들었던 학교가 영원히 폐교되는 실정에 이르렀다.


나는 옛 추억이 그리워서 청계 국민학교 건물을 그대로 리모델링했던 동국제강 본사를 한때 기웃거렸지만, 지금은 고층빌딩으로 변해 상전벽해가 되었다.


그래도 을지로 입구에 올 때마다 내가 뛰고, 노래했고, 공부했던, 내 어린 시절 다녔던 옛 청계 국민학교 자리를 바라보는 이유는 무엇일까?


글쓴이   서치펌 싱크탱크 대표 이규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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