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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규선 Sep 13. 2021

어느 노인들


대전에서 사업하는 동기가 얼굴 한번 보자고 해서 사당동에 있는 식당에 갔다.


저녁 7시여서 그런지 식당은 손님들로 왁자지껄했고, 나는 좁은 탁자를 비집고 식탁에 둘러앉아 기다리던 친구들과 인사를 나눴다.


얼마쯤 지났을까, 우리 앞자리에서 80세는 족히 되어 보이는 노인 3분이 파전에 막걸리를 기분 좋게 드신 후에 한분 한분 일어나기 시작했다.


그중 한 분이 마루 끝에 걸터앉은 나를 살짝 밀치고 마루 밑에서 신발을 찾아 신고 나갔다.


그분들이 나간 후에 우리도 술자리를 마치고 나가려는데 친구 A의 신발이 보이지 않았다.


아뿔싸!


우리는 휴대폰 불빛을 비쳐가면서 마루 밑을 샅샅이 뒤졌지만, 결국 친구의 신발은 보이지 않았다.


혹시나 해서 친구 A에게 신발의 색상과 모양을 물으니 아까 노인이 신고 갔던 그 신발이 틀림없었다.


이를 식당 주인에게 얘기한 후에 다시 자리에 가보니 앞자리에는 술 취한 노인이 놓고 간 중절모가 그대로 있었고, 조만간 찾아올 것을 대비해 친구 A의 전화번호를 적어두었다.


친구는 꽉 끼는 노인의 신발을 신고 집에 갔다. ㅋ


~~~~~


친구들과 헤어진 후에 집으로 가는 지하철에 앉아있는데, 교대입구역 승객들 속에서 갑자기 싸우는 듯 커다란 목소리가 들렸다.


사연은 모르겠으나, 탑승과정에서 승강이가 벌어진 것 같았고, 키가 큰 40대 젊은이와 80세는 되어 보이는 건장한 노인이 멀리 떨어지면서 서로 욕을 하고 있었다.


내 옆 좌석으로 온 노인은 성이 안 풀렸는지, 요즘 얘들은 썩어 빠져 노인을 대하는 태도가 글러먹었다고 하며, 우리 때는 625도 겪었고 힘든 시절을 이겨냈다고 푸념하였다.


그런데 줄곧 현장을 지켜본 듯, 내 옆에 있던 아저씨가 이쪽저쪽을 쳐다보면서 씩씩거렸다.


나는 노인의 얘기만 듣고, 젊은이가 무례하게 행동한 것으로 파악했는데. 아저씨는 나도 환갑이 지났다고 젊은이에게 들으라는 듯 소리치며 오히려 노인에게 역정을 내었다.


그 사이에 노인석에 앉아 두툼한 배낭에서 러시아어로 된 책을 꺼내 보던 80 노인이 그 아저씨를 향해 나 들으라고 하는 소리냐며 시비를 걸었다.


아저씨는 자기가 53년생이라고 하면서 '노인이 주책이야'라고 소리치며, '됐습니다, 됐어요!' 하면서 다음 정거장에서 내렸다.


그 노인은 큰 잘못이 없는 듯한 표정으로 조용히 책을 보기 시작했다.


오늘 저녁 노인들의 연이은 해프닝에 실망했지만, 한편  80 노인이 언제 어디에 써먹으려는지 모르겠으나 러시아어 책을 보는 모습을 보고 감동했다.


나도 이래저래 항상 긴장하며 정신 바짝 차려야겠다.


글쓴이   서치펌 싱크탱크 대표 이규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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