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주올레 425km 완주
한 발자국이 섬의 윤곽을 돌고 돌아 다시 원점을 밟는 궤적을 완성하기까지.
완주하지 않을 결심
누군가에겐 완주의 꿈. 내겐 꿈처럼 너무도 아득해서 감히 넘볼 수도 없는 게 바로 완주였다. 타고나길 전무한 운동 감각으로 다른 섬세한 기술 필요 없이 직립 보행만 하면 되는 걷기라면 무턱대고 자신 있었지만, 그렇다고 해서 425km(현 437km)의 장벽까지 만만하게 본 건 아니다. 처음엔 한 자릿수 km의 코스만 골라 걸었을 정도로. 어차피 완주는 생각지도 않았기에, 패스포트에 스탬프를 찍는 인증 방식에 구애받지 않고 내 길을 걸어 나갔다. 걷기의 재미와 스탬프의 묘미를 점점 알아갈수록 처음부터 스탬프를 찍지 않은 게 계속해서 떠오른 건 나중에서였다.
확실한 취향은 자연
나름 제주에 대해 알만큼 다 안다고 자부했었다. 돌이켜 보니 내가 알고 있는 유명한 관광지와 유행하는 맛집 같은 건, 단지 얼마 동안의 시간과 외부 요소에 의해 얼마든지 바뀌고 기대한 것보다 실망할 때가 많았던 일시적인 것이었다. 반면 길은 달랐다. 긴 파노라마에는 찬연한 자연과 돌담으로 둘러싼 마을이 언제나 우직하게 자리했고, 같은 길을 다시 걸어도 시시각각 다른 모습을 보여주는 이채로움이 있어 질리는 법이 없었다. 부드러운 오름의 능선, 풍성한 녹음의 명암, 일렁이는 에메랄드빛 물결. 헤아릴 수 없는 자연의 아름다움이 매 순간 물밀 듯 다가왔다.
혼자는 오히려 좋아
올레길은 혼자 걷기 위험하다는 인식이 있다. 여자 혼자서는 걷지 말고 꼭 같이 걸어야 한다고. 실제로 좁은 길엔 인적이 드문 곳이 많아 갑자기 사람이 나타날 때면 흠짓 놀라기도 했다. 하지만 항상 두려움보다 혼자 만의 고요와 오롯한 성취감으로 인한 충만함이 훨씬 더 크게 도보 여행을 지배했다. 걸음이 빠른 편인 데다가 빠른 체력 고갈로 빨리 치고 빠져야 하는 내 속도에는 누군가와 함께 맞춰 걷는 것보다 혼자 걷는 방식이 부합하기도 했다. 이런 점도 걷기 전까진 몰랐다. 내게 온전히 집중해서 새로운 면모를 알게 되는 순간은, 새로운 누군가를 알게 되는 것만큼이나 잔잔한 파장을 일으켰다.
행복은 길 위에
상투적인 표현일지라도 도보 여행 내내 느낀 감정은 행복이다. 눈앞에 펼쳐지는 모든 것들이 아름다워서도 있지만 견고한 걸음을 파고드는 마음 때문에. 어느 날 4코스의 감귤밭을 지나칠 무렵, 의자 한켠에 ‘길을 걷는 사람들은 맛있게 드세요’ 란 메모와 함께 파지 천혜향이 수북이 놓여 있었다. 가까이 편의시설도 없는 길가에 서서 먹는 과일은 그동안 먹어 온 만감류 중 손에 꼽을 정도로 달고 시원했다. 누구인지도 모르는 상대에게 선뜻 내어준 호의가 여상한 그날의 도보 길을 따듯이 기억하게 했다. 그러고 보면 대부분의 길을 혼자 걸었어도 외로움을 몰랐다. 안내소에선 항상 친절하게 초행길을 알려줬고, 길에서 우연히 만난 사람들은 여느 날처럼 안녕과 응원을 건네서. 이런 순수한 호의들이 감싸고 있는 내 여행은 당연히 행복일 수밖에 없었다.
마침내 도전의 끝
마지막이 돼서야 완주 계획에 변수를 만났다. 가장 쉬운 가파도 코스를 하나 남겨 놓고 있던 시점에서 잇따른 풍랑과 호우 주의로 선착장에 계속 헛걸음을 했다. 네 번 만에 어렵게 가파도 코스까지 마쳤음에도 불시의 격리에 공식 완주자로 인정받으러 갈 수 없게 됐다. 격리 해제일에 곧바로 여행자센터로 향했다. 한 사람을 위한 완주증과 완주메달 수여식, 그리고 한 날 한 시에 완주자가 된 이들의 환호. 비로소 걷기의 종지부를 맺은 듯 완전한 결말이었다. 완주자가 된 후, 엄마에게 전화를 걸어 드디어 완주를 했다고 전했다. 완주를 결심했을 때도 엄마에게 포부를 밝혔었다. 역시나 이번에도 잘했다는 간결한 대답이 전부였지만, 그게 모두 인생에서 잘한 일이었다는 건 엄마 말대로 그때도 지금도 맞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