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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박은경 Feb 10. 2024

낭만적 레몬 화석

300년 묵은 레몬에는 ‘1739년 11월 4일 루 프란치니가 E 벡스터에게 보낸다’는 글귀가 새겨져 있습니다. ‘인도에서 영국으로 수입된 것으로 보이며 낭만적 선물로 보낸 것으로 추정된다’고 소개되어 있습니다. 19세기 보관장의 맨 아래 서랍에서 발견되었는데 초기 입찰가 6만 원에서 235만 원에 낙찰되었다는군요. 레몬이라기보다는 레몬 화석, 거의 찌그러진 검정 공처럼 보이네요.


그런데 “추정”은 되는 것이 아니라 하는 것, 아닌가요. 추정(推定)은 추측해서 판정한다는 뜻이고, 추측(推測)은 미루어 헤아린다는 뜻이고, 판정(判定)은 판별해 결정한다는 뜻인데 이런 식으로 따지자면 밤이 다 샐 것 같습니다만 단서가 거의 없으니 추정될 수밖에 없는 상황일 수도 있겠군요.      


인도에서 수입되었다니 레몬이 특별하던 시대, 값이 비쌌겠어요. 귀한 레몬을 프란치니는 벡스터에게 선물합니다. 벡스터는 그것을 바라보기만 할 뿐 소중해서 먹지는 못한 것 같아요. 그들의 손에서는 은은한 레몬 향이 났겠지요. 그들의 공간에도 레몬 향이 오래도록 떠다녔겠습니다. 해를 보기 힘든 영국의 겨울, 레몬이 햇살처럼 환했겠습니다.      


프란치니와 벡스터는 어떻게 되었을까요. 낭만적인 선물이 낭만적 사랑으로 피어났을까요. 레몬의 내부에는 텅 빈 검은 씨와 물기 사라진 세포벽만 남았을 텐데요. 평생을 버리지 못하고 간직한 것으로만 봐도 낭만적 사랑의 증거였을 것 같고요. 혹여 버릴 수도 없고 처치 곤란이라 서랍 속에 방치하다가 까맣게 잊어버린 것이라면 이야기는 처음부터 다시 써야 하겠습니다.      


귤이 아니어서 다행입니다. 바나나가 아니어서 더욱 다행입니다. 외유내유는 힘이 없습니다. 외강내강은 쓸모가 적습니다. 외유내강이나 외강내유, 둘 중 하나만 해야겠어요. 새해 단단한 날들 보내세요.


(2024. 2.8 연합뉴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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