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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다음 책의 초심

by 김박은경

앨런 가넷(빅 데이터 전문가)은 말콤 글래드웰의 ‘1만 시간의 법칙’에 내포된 한계를 지적합니다. 어떤 일이든 1만 시간만 연습하면 누구나 전문가 수준으로 할 수 있다는 주장에 대한 반박이지요. 이 법칙의 근거가 된 논문의 저자 에릭슨은 ‘자동성은 전문성을 기르는 데 적’이라고 말합니다. 얼마나 많은 시간을 보내느냐가 중요한 게 아니라 그 시간을 어떻게 보내느냐가 중요하다는 것이지요.


누군가의 첫 책을 선물 받을 때면 몹시 두근거립니다. 제 첫 책이 떠오르면서요. 그게 어떻게 나오게 되었는지 알 것 같아서요. 그 책을 쓰기까지 얼마나 많은 고민과 고생을 했을지 알 것 같아서요. 혜성과 같이 나타나는 천재적 작가는 모를 것도 같은데 어쩌면 천재적 작가들의 그늘진 시간을 제가 모르는 것일 수도 있겠네요.


작가들은 첫 책을 내기 위해 ‘1만 시간의 법칙’ 같은 삶을 살았을까요. 1만 시간이면 얼마나 되는 세월인가요. 먹고 자고 일하면서 간신히 확보하는 시간을 계산하면 될까요. 먹고 자고 일하는 시간 내내 책 생각을 했을 수도 있겠지요. 그렇다면 저자가 살아온 시간이 통째로 바쳐진 결과물이 그 한 권의 책일 것 같습니다. 그다음 책은 그전 책에 들인 시간을 기반으로 쌓아 올리는 구조물이 되겠지요. 점점 더 단단하고 깊고 높은 글을 쓰게 되는 것이라고 기대하고 있습니다.


시인들의 첫 시집이 제일 좋다는 말을 많이들 하는데요. 이것이 시가 될 수 있을까 하는 의심과 무수한 시도와 실험과 노력이 뒤엉켜 끓다가 진액 같은 상태가 되었을 거예요. 살아온 일생 중 하이라이트, 말할 수 없었던 이야기와 말하고 싶었던 이야기도 뒤섞여 있을 거고요. 그것은 끝없는 방황이고 맨땅의 헤딩이고 맹렬한 낙하이며 통렬한 고백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혹시 그다음 시집이 별로라면 좀 쉽게 생각하고 느슨히 쓴 건 아닌지 돌아보아야 합니다. 자기 복제의 늪에 빠졌을 수도 있고요. 객관화가 불가능해졌기 때문일 수도 있습니다. 해법이라면 첫 시집을 내기 전의 마음으로 돌아가는 것 아닐까요. ‘초심’ 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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