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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박은경 Apr 23. 2024

용서가 필요 없는 일

철쭉도 피고 연등도 피고 등나무꽃도 잔뜩 피었습니다. 달려가는 구급차는 조용합니다. 건물 창가에는 빛을 향해 내놓은 화분들, 책상 위에는 작은 화병과 뭔지 안 보이는 꽃이 꽂혀 있네요. 고개를 돌리자마자 흰 눈이 아니 꽃눈이 쏟아져서 동영상을 찍으려는데 바람이 멎고는 내내 고요합니다. 기다리면 바람이야 또 불겠지만. 단 한 번 보았다고 생각하니 소중해져서 눈을 감고 서서 방금 전의 낙화를 그려봅니다. 잊고 싶지 않습니다.


살며 겪으며 저지르며 용서할 수 없다고 미워하는 대상이 생깁니다. 처음엔 분노하고 시간이 지나며 흐릿하지만 일부러 되새기며 싫어, 미워해, 증오하지만 역시나 감정은 가라앉습니다. 타인을 탓할 일이 아닙니다. 나의 책무가 전혀 없는가 냉정히 따지자면 그렇지 않습니다. 타인에 대한 근거 없는 낙관, 어리석은 믿음, 부질없는 연민, 우스꽝스러운 박애주의가 저지른 일입니다. 여기저기 그림자들을 밟고 다녔으나 그림자 주인이 나라는 것을 알겠습니다.


용서할 필요도 없습니다. 타인에게 따질 일도 아닙니다. 내 잘못이니까요. 다 내가 저지른 일이니까요. 내가 가해하였으니까요. 이렇게 생각하면 기분이 한결 낫습니다. 실수를 했지만 무언가 배웠고 잘못이라고 말하는 대신 책무라고 생각하니 기분이 더 좋아집니다. 전철역 거울에 어떤 여자가 머리에 밥풀 같은 것을 잔뜩 달고 심각해 보입니다. 가만히 보니 제 머리에 꽃잎들이 잔뜩이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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