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들의 무궁무진, 강화도 12

by 김박은경

11. 저항하다-resist-抗 : 초지진, 덕진진, 광성보

1) 운요호 사건과 초지진

초지진은 강화에 있는 방어시설, 5진 7보 53돈대 중 하나입니다. 이중 다섯 개의 진은 강화해협을 사이에 두고 김포와 마주보는 곳에 자리 잡고 있습니다. (5진-월곳진, 제물진, 용진진, 덕진진, 초지진)가장 규모가 큰 진은 강화도의 동서남북에 위치하거나 중국과 마주보는 서쪽 해안에 자리 잡는 게 맞을 것 같은데 그렇지 않은 이유에 대해 『강화도의 기억을 걷다』의 최보길은 강화의 5진이 왕조와 수도 서울을 방어하기 위한 목적이 더 컸을 거라고 봅니다. 또 세곡을 운반하는 운송로였음을 간과할 수 없다고 지적합니다.


11-1.jpg (초지진. 사진출처: 강화군청)

5진 중 서울로 향하는 길에서 처음 맞이하게 되는 진이 초지진입니다. 병인양요, 신미양요, 운요호 사건 등이 모두 이곳에서 일어났지만 운요호 사건이 일어난 곳으로 더 많이 알려져 있습니다. 운요호는 일본 나가사키에서 출발합니다. 오늘날 일본의 역사 교과서는 운요호와 초지진의 만남을 ‘강화도 사건’이라고 적고 있습니다.


운요호 사건을 계기로 일본은 조선과 새로운 관계를 요구합니다. 그동안 조선은 중국 중심의 중화질서 안에서 일본을 대했지만 일본은 근대화 과정에서 천황을 중심으로 메이지유신이라는 새로운 정치체계로 개편합니다. 하여 중국의 황제를 천황과 같은 한 나라의 통치자로 여기게 되지요. 외교문서에서도 황제의 격을 사용하고요. 이렇게 시작된 국제질서의 변화는 조선 내부의 흥선대원군 실각과 고종의 친정체제 구축과 개화파의 성장과 중국의 무관심 등과 맞물려 일본과의 관계 변화를 가져옵니다.


이 사건을 바라보는 한국과 일본의 시각은 다릅니다. 일본은 조선의 연안을 항해하던 자국 배에 조선이 선제공격을 가하여 정당방위 차원에서 대응 포격을 한 우발적 사건으로 규정하고 있습니다. 한국은 일본의 의도적 항해와 의도적 포격과 교전으로 보고 있습니다. 침략을 위한 계획적 사건이라고요.


『강화도의 기억을 걷다』의 최보길은 이 조약 체결에 대해 다음과 같이 말합니다. “일반적인 조약 체결의 과정에서는 조약의 각 항목에 대한 수정, 삭제, 조율의 과정이 있어야 하지만 강화도조약 체결 과정에서는 일본에서 미리 작성한 13개 조항 중 한 조항을 제외하고 조선이 수용하는 모습이었다. 이 밖에도 우리가 학교에서 배우는 해안측량권 인정, 영사재판권의 허용과 함께 조선과 일본의 관계가 내용적으로는 불평등하다는 것을 의미한다.” 심지어 회담장 앞에는 최신식 무기인 개틀링 기관총 4문이 회담장을 조준하고 있었다고 합니다. 강화도조약이 체결된 장소가 연무당입니다. 이 조약에 의해 우리나라는 부산과 인천과 원산을 일본에게 개항하게 됩니다.


2) 병인양요와 덕진진

덕진진 또한 강화 5진 중 하나입니다. 고려시대 해안 방어를 위해 토성으로 축성되었다가 조선시대에 들어서며 지금과 같은 석성으로 거듭나지요. 19세기 대포를 활용한 전술에서 조선의 무기는 그다지 위력을 발휘하지 못했다고 합니다. 폭발력이 크지 않아 상대에게 큰 타격을 줄 수 없었다고요. 강화를 찾은 서양의 배는 쇠로 만든 것이었고 조선과 달리 2차 폭발력이 있는 포를 사용하여 우리의 피해가 오히려 더 컸다고 합니다.


11-2.jpg (덕진진. 사진출처 강화군청)

덕진진은 병인양요 당시 이미 강화도 읍내를 장악한 프랑스군을 강화도에서 물러나게 한 양헌수 장군이 500여 명의 포수와 함께 들어온 곳입니다. 어두운 밤, 소리 없이 해협을 건너 전등사로 들어가 격전에 대비했고, 프랑스군은 전술에 밀려 조선군보다 강력한 화력에도 불구하고 물러서게 됩니다.


조선과 프랑스의 전쟁에서 누가 승리했을까요? 우리는 우리의 승리라고 하고 싶지만 소중한 왕실 관련 도서를 잃었습니다. 쇄국의 의지가 꺾인 채 조·불조약을 체결하였습니다. 많은 사람들의 생명과 재산을 잃었습니다. 군인보다 민간인의 피해가 더 컸음은 물론이고요.


덕진진 경고비는 ‘바다 문을 막아 지키고 다른 나라 배는 지나는 것을 삼가라’는 내용입니다. 흥선대원군이 쇄국정책의 의미를 담아 건립하였다고 하는데요. 대원군은 신미양요 후에 쇄국의 의지를 더욱 강화하여 전국에 척화비를 건립하였다고요. 그러나 덕진진 경고비 가장자리에는 포탄의 흔적이 선연할 뿐입니다.


11-3.jpg (덕진진 경고비. 사진출처: 강화군청)

3) 신미양요와 광성보

1866년 병인양요 후 평화롭게 살고 싶은 간절한 바람에도 불구하고 강화는 1871년 신미양요를 겪습니다. 나가사키를 출발한 미국 아시아 함대는 초지진을 공격한 후 덕진진을 지나 광성보에서 조선군을 다시 만납니다. 강화에서 있었던 미국 군함과의 여러 전쟁을 통칭하여 신미양요라고 부르는데 그중 광성보가 가장 치열한 전투 현장입니다.


11-4.jpg (광성보. 출처는 강화군청)
11-5.jpg (광성보에 소속된 용두돈대. 사진출처: 강화군청)

광성보에서 벌어진 전투 현장에 대한 인용문 일부를 옮깁니다. (최보길, 『강화도의 기억을 걷다』, 살림터)

“조선군 몇몇은 불에 새까맣게 타버린 채, 그 주위에 떨어진 9인치 포탄의 폭파로 산산조각이 나버렸다. 좁은 지면 위에 쌓인 조선군 시체만도 40구가 되었고, 머리에 총탄을 맞아 죽은 자가 대부분이다. 그들이 입은 옷은 모두 흰옷이었고, 흰옷에 붉은 피가 물들여져서 적백색이 더욱 두드러진 대조를 이루었다.”

-딜톤의 『1871년 해병대의 한국상륙작전』에서


“그토록 적은 공간에 그리고 그토록 짧은 시간에 그토록 많은 탄환과 포연이 집중되는 것은 남북전쟁의 고참들도 일찍이 본 적이 없었다. 그들은 난간에 올라서서 용맹스럽게 싸웠다. 그들은 미군에게 돌멩이를 던졌다. 그들은 창과 칼로써 미군을 대적했다. 손에 무기가 없는 그들은 흙가루를 집어 침략자들에게 던져 앞을 보지 못하게 했다.”

-그리피스의 『은자의 나라-한국』에서


“조선군은 근대적인 무기를 한 자루도 보유하지 못한 채 노후한 전근대적인 무기를 가지고서 근대적인 화기로 무장한 미군에 대항하여 용감히 싸웠다. 조선군은 그들의 진지를 사수하기 위하여 용맹스럽게 싸우다가 모두 전사했다. 아마도 우리는 가족과 국가를 위해 그토록 강력하게 싸우다가 죽은 국민을 다시는 볼 수 없을 것이다.”

-슐레이의 『기함에서의 45년』에서


그때 빼앗긴 수자기(帥字旗)가 2007년에 돌아왔습니다. 광성보에서 강화를 수비하는 진무영의 지휘관을 상징하는 것인데요. 부대의 최고 지휘관을 뜻하는 ‘수(帥)’자가 그려진 깃발입니다. 우리가 패배한 전투였으니까요. 미국 애나폴리스 해군사관학교박물관 로비에는 미 해군이 세계 각지를 돌며 벌인 전쟁에서 획득한 전리품 중 깃발을 모아 전시하고 있다고 합니다. 수자기는 10년 장기 임대의 형식으로 돌아온 것인데요. 훔쳐가고 빼앗아가고 빌려준다는 게 말이 되나요. 전 세계 박물관들의 만행이기는 하지만요.


전쟁의 결과는 참혹했습니다. 미군 전사자는 3명, 부상자는 10명인데 조선군 전사자는 350명, 부상자는 20명에 달했다고 합니다. 광성보의 안해루를 지나면 쌍충비각이 있습니다. 미국에 저항하여 순국한 어재연 장군과 동생 어재순 형제를 위한 순절비와 전투에 참여한 병사들을 위로하는 ‘광성파수순절비’가 서 있습니다. 쌍충비각 아래쪽에는 신미양요 때 시신을 수습한 51명의 병사 중 신원 확인이 안 된 시신을 7개의 봉분으로 나누어 장례를 치르게 한 신미순의총도 있습니다. 백병전이 벌어졌던 손돌목돈대도 이곳에 있습니다. 거짓말처럼 고요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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