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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박은경 Jul 27. 2024

아무 날도 아닌데 꽃 사기

꽃을 삽니다. 아무 날도 아닌데 꽃 사기, 나 자신을 위해 꽃 사기. 드디어 그런 사람이 되었습니다. 무슨 꽃인지 묻지 않고 데려왔습니다. 당연히 백합이겠거니 하고요. 그런데 약간 날렵한 꽃봉오리를 보니 백합처럼 피어나지 않을 것도 같아요. 그럼 나리꽃인가 하고 찾아보니 나리꽃과 백합은 같은 꽃이었네요. 게다가 백합이 흰 꽃이라는 의미인 줄 알았는데 알뿌리의 겹겹을 의미하는 일백 백의 백합이었습니다. 꽃잎은 여섯 개처럼 보이지만 세 개가 꽃잎이고 세 개는 꽃받침이라고 합니다.


어떤 모습으로 만개할까 고대하니 곧 핍니다. 하나하나, 결국 열 송이가 가득히 핍니다. 방향제 향기 같아요. 아니, 방향제가 백합향을 따라 했겠지요. 그렇게 열흘 남짓 피었습니다. 물을 갈아주고 손을 씻는데 손이 노랗습니다. 어디서 물이 든 걸까. 카레의 노란빛 같기도 한데 카레를 만지지도 않았는데 수술의 꽃가루들이 달라붙었습니다. 내가 암수술인 줄 안 걸까요. 지워지지 않아서 한참이나 노란 손을 하고 있었습니다. 암술 꽃머리는 진액이 뚝뚝 흘러넘쳐요. 역시나 손등에 떨어지고야 맙니다. 넘치는 생명력에 놀라며 절화란 꽃에게는 못할 짓이다, 저 스스로 좋은 것은 하나도 없고 남 좋은 일만 하고 간다, 서글퍼졌습니다. 그게 운명이라고 하면 기구하달밖에요.

누가 꽃으로 피어나고 싶었겠습니까. 향도 없고 못 생기는 편이 나을 뻔했습니다. 숲에서 못생기고 효용도 없는 나무가 오래도록 살아남는다던 그 이야기가 떠오르더군요. 화무십일홍이라더니 이 꽃도 열흘 갔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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