풀이 죽는다는 말은 인공과 가공이 전제합니다. 네이버사전에서는 그 말을 이렇게 풀이합니다. "활기나 기세가 꺾이다. 종이나 피륙 따위를 빳빳하게 하기 위해서 밀가루나 쌀 따위로 풀을 쑤어 먹임으로써 풀기가 배어들게 한다. 풀을 먹인 것이 시간이 오래되면 풀기운이 죽어 볼품이 없는 것에 빗대어서 이르기 시작한 말이다." 풀을 먹이는 일에는 타자의 수고가 필요하다고요. 먹는 게 아니라 먹이는 거라고요.
빛이 가득 들어오는 마루에서 풀 먹이던 엄마 생각납니다. 고단하고 지루한 일 같은데 반듯반듯 빛나는 옷이며 베갯잇이며 이불은 투명하고 환했습니다. 피부에 닿는 정갈하고 쾌적한 느낌도 생생합니다.
풀을 먹인 것은 풀이 죽습니다. 풀은 섬유의 입장에서는 꾸역꾸역 삼켜야 하는 과정이지요. 입도 없는 옷감의 씨실날실 사이를 비집고 들어가 꼼짝도 못 하게 하니까요. 흐르고 휘날릴 수 없는 구속의 상태라고나 할까요.
전철 맞은편 한 노인은 주먹밥과 빵 하나를 들고 앉아 있습니다. 푸른 셔츠에 눈빛이 형형합니다. 노약자석의 여인은 카트에 새송이버섯 박스를 얹고 손잡이에는 무명천을 감았습니다. 자리에 앉자마자 비닐봉지를 꺼냅니다. 무슨 가죽조각 같은데 쥐포일까요. 앞니로 힘껏 끊으려다가 실패, 손으로 뜯어 입에 넣고 통화하십니다. 긴 통화는 바나나, 당뇨, 예배, 그런 이야기입니다. 자판을 두드리는 사이 내리셨습니다.
요즘 잔뜩 풀이 죽습니다. 생로병사야 어쩔 수 없는 일임을 알지만, 아는 것과 받아들이는 일은 다르니까요. 아버지 선생님 다시 아버지 다시 선생님. 무엇 하나 억지로 할 수 없는 것들. 아버지 틀니는 선홍색, 이들은 반듯반듯 빈틈없이 아름답습니다. 누가 이렇게 단단하게 풀을 먹였나요, 그것은 자꾸 헐거워집니다. 조절해도 다시 헐겁습니다. 수분이 부족해서 그렇다고요. 약한 것이 더욱 약해진다고요. 그래서 더 못 드십니다. 피륙이 너무 낡으면 풀을 먹일 틈이 없습니다. 아무리 잘 끓인 풀도 스며들 수가 없습니다. 임플란트를 하고 싶어 하시는데 다른 병이 깊어 그도 불가능하다고 합니다. 돈도 돈이지만 몸이 안 된다고요. 마음은 무겁고 축축 늘어집니다. 풀을 먹여야겠는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