앤디 워홀의 소를 보면서 이중섭의 황소와 김홍도의 소, 김시의 소와 김두량의 소와 알타미라 라스코의 동굴벽화 속 소 등을 떠올립니다.
1966년, 워홀은 한 농업 신문에서 본 평범한 소의 사진을 워홀의 소로 만듭니다. 먼로나 앨비스 같은 유명인의 얼굴 대신 소의 얼굴이 실크스크린으로 다시 태어나지요. 명랑함을 강요받은 듯 무구하고 무상한 표정입니다.
이중섭의 황소는 힘과 분노가 아니 뜨거운 생명력이 가득합니다. 코와 입가의 붉은색, 배경의 붉은색은 단 한번 본 것만으로도 잊을 수 없게 만듭니다. 그의 소는 그가 오산학교 시절부터 열중했던 소재로 그의 자화상이면서 우리 민족의 얼굴 같습니다. 분기탱천의 순간, 캔버스를 찢고 나올 듯합니다.
이들의 소가 주인공인 것에 비해 김홍도의 소는 배경이고 도구입니다. 앞으로 나아가지만 날아오르는 것 같습니다. 아니, 달아나는 것도 같아요. 둘이 리드미컬하게 발을 맞추네요. 계절은 봄, 논을 갈고 있어요. 한 마리도 힘이 센데 두 마리가 달려드니 넓은 논이라 해도 순식간에 부드럽게 만들겠습니다.
김두량의 소는 배경인 듯 배경 아닌 소입니다. 소를 빼면 그림이 완성될 수 없겠지요. 제목은 목동오수입니다. 목동의 낮잠에 주인공은 소입니다.
김시의 황우도는 소가 주인공인데 뒷모습을 그립니다. 정면이 아닌 그림은 흔치 않은 듯한데요. 육중한 몸에 경쾌한 발굽이 명랑합니다. 신화 속 소의 원형 같습니다.
모두들 소를 그리지만 자신만의 소가 태어납니다. 현재 그리는 소는 과거의 생을 반영하겠지요. 그렇다면 미래에 그릴 그림은 현재의 생이 반영됩니다. 어떻게 살 것인가, 어떤 생의 그림을 그릴 것인가 다시 생각하게 됩니다. 오늘 하루가 내일의 그림이 될 테니까요.
워홀은 말합니다. "모든 것은 스스로를 반복한다. 모든 것은 반복일 뿐인데, 사람들이 새로운 것이라고 생각하는 것이 놀랍다." 저는 워홀 씨 생각과 조금 다릅니다. 반복조차도 새로워지는 거라고 생각합니다. 자신의 숨과 결과 시간이 투영되니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