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안함이 밀려듭니다. 계획대로 되지 않아서 의기소침합니다. 열심히 해서 뭐 하나 싶기도 하고요. 안 되나 보다, 못 하나 보다 주저앉습니다. 그렇게 차일피일 모든 일을 멈추고 가라앉습니다. 충분히 가라앉으니 답답합니다. 또 다른 불안이 옵니다. 나라는 인간의 나약함과 마주합니다. 패럴림픽 선수들의 최선을 보며 놀랍니다. 한계란 없는 것인가 싶어 집니다. 받아들이지 않는 자에게 그것은 (무엇이든) 오지 않는다는 것, 기어이 오더라도 가장 끝에야 온다는 생각에 다다릅니다.
비욘 나티코 린데블라드의 <내가 틀릴 수도 있습니다>를 읽습니다. 아잔 자야사로 스님의 마법의 주문에 줄을 긋습니다. 갈등의 싹이 트려고 할 때, 누군가와 맞서게 될 때 이 주문을 세 번 반복하라고요. 그러면 근심은 이슬처럼 사라질 것이라고요. 주문은 이것입니다.
"내가 틀릴 수 있습니다. 내가 틀릴 수 있습니다. 내가 틀릴 수 있습니다."
이 주문을 제 절망과 최선에도 더해 봅니다. 나의 최선이 틀릴 수 있다고요. 최선의 최선이 아니었을 수 있다고요. 지금의 절망이 틀릴 수 있다고요. 절망할 일이 아니라고요. 시간이 없다는 판단도 틀릴 수 있습니다. 알 수 없는 시간의 제한을 모르는 척 늘여봅니다. 미리 타임아웃 지점에 간 듯 늘어지지 말자고요. 이 순간만 살자고요. 차창에 아직 열 다섯 정도의 여자아이가 비추어 보입니다. 그 아이로부터 그리 멀리 온 것 같지가 않아요. 안녕, 나야. 오늘 하루 뭐든 가볍게 쉽게 해 보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