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이기적인 삶

by 김박은경

전화를 받지 않으신다. 열 번 정도 연결음을 듣다가 끊는다. 운동을 하시나, 잠드셨나, 무슨 일이 생긴 건 아니겠지, 생각하면서도 불안하다. 세탁실로 나가는데 벨이 울린다. 달려가 받는다. 느리지만 정확한 발음, 선생님이다.

“내가 전화받는 것도 힘이 들어서, 시간이 걸려.”

“그럼요, 그럼요.”


음성을 더 잘 듣고 싶어서 휴대폰을 귀에 바싹 댄다. 이어폰을 꽂고 싶지만 그러는 사이 무슨 말을 놓칠까 싶어서 참는다. 무슨 이야기를 할까. 어떤 안부를 여쭙는 게 좋을까. 어디가 얼마나 아픈지, 얼마나 나아졌는지, 언제 다 나아지는지, 지내기는 어떠신지, 퇴원은 언제 하시는지 묻고 싶은 게 산더미지만 분명한 것보다 분명치 않은 것이 더 많을 테니 참는다. 묻고 답하는 중에 더 아프고 다시 아플까 봐 참는다. 질문이 아무 위로도 힘도 되지 못하는 것 같아서 참는다.


갑자기 나빠졌던 증상은 좋아졌다고, 다른 것은 큰 차도가 없다고 하신다. 왜요, 왜 그렇대요, 물리치료도 받으시고 약도 드시는데 왜 빨리 좋아지질 않는 거래요, 따지듯 묻고 싶지만 참는다. 선생님도 모르고 선생님의 의사 선생님도 모르고 모두들 영문도 모르는 채 앓고 있다. 견디고 있다. 그래도 희망을 버리지 말아야지, 끝까지 기도하고 희망해야지. 좋아지실 거라는 말을 더했다.


이제 간병인 대신 통합간병병동으로 옮기셨다고, 눈이 나빠서 꽃은 알아볼 수 없지만 창 가까운 병상이라 초록이 다 보인다고. 이제 팔 월이면 일 년이라고, 그때쯤엔 퇴원할 거라고 하신다. 병원에 있는다고 좋아지는 것 같지도 않아서 퇴원하는 게 나을 것 같다고, 하지만 퇴원하고 집에서 어떻게 지내야 할지, 해낼 수 있을지 걱정이라고. 그럼요, 그럼요, 나는 영문도 모르는 채 보이지도 않을 고개를 연신 끄덕이고 있다.


별일 없냐고 물으신다. 별일 없다고 대답한다. 별일이 있지만, 크고 많지만 그런 대답은 도움이 되지 못할 거다. 나는 회사 잘 다니고 아픈 데도 없고 아버지도 괜찮으시고 모두 좋은 상황인 척 군다. 선생님은 한 마디 더하신다.

“이기적으로 살아요. 특히 은경 씨는 이기적으로 살아야 해요. 내 말 무슨 뜻인지 알지요?”

“그럼요, 그럼요.”


실은 잘 모르는 것 같다. 따끈해진 휴대폰을 들고 한참을 세탁기 앞에 있다. 선생님은 병원 침대에 앉아 지친 숨을 몰아 쉬시겠지. 선생님이 당부하실 정도로 내가 이기적이지 않은 삶을 살고 있나. 이기적이란 자기 자신의 이익만을 꾀하는 것. 타산적, 현실적, 계산적이라는 말과 비슷하고, 희생적이라는 단어가 반대말이다. 이기적인 삶에 대해 고민한다는 건 이미 충분히 이기적이라는 뜻이 아닐까. 그게 아니라면 무엇이 나의 “이기(利己)”인지 조차 내가 모른다는 뜻일까.


모르겠다. 모르겠고 아픈 선생님께 돌아가신 아버지 이야기도, 써지지 않는 글에 대해서도, 이즈음의 상심과 무의미와 상실 등에 대해서도 말할 수 없었다. 그저 초록을 향해 난 병실 창 가득 좋은 빛과 향이 들어차기를, 그 기운으로 어서 좋아지시기를 기도드리는 저녁이었다.

keyword
매거진의 이전글자판을 두드릴 일인가, 아버지가 돌아가셨는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