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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랑하는 사람을 내다 버린다

by 김박은경

“남의 병 이야기는 정말 재미있을 거야.” 메이의 책 『아프다는 것에 관하여』는 버지니아 울프의 말로 시작된다. 두 작가의 의중을 모르는 바는 아니지만 남의 병 이야기가 나는 재미있지 않다. 듣고 싶지 않다. 무섭고 슬프고 싫다. 그러나 아프지 않은 사람이 없고, 아프게 되지 않을 사람은 적다. 어느 집이나 앓는 사람이 있고, 그 사람 때문에 힘든 사람이 있고, 그 힘든 일을 도맡는 사람이 꼭 있다.


그날 그 병원의 점심 면회는 십 분이나 지연되었다. 하루 중 삼십 분 면회인데 길게 기다리던 사람들 중 누구도 항의하지 않는다. 묵묵히 서로 눈짓을 하고, 귀엣말을 하고, 귀가 잘 들리지 않는 노인에게 입을 크게 벌려 말을 하고 기다린다. 중환자실 앞, 비닐 옷을 입고 장갑을 끼고 마스크를 쓴 사람들이다. 코로나는 지나갔지만 다시 돌고 있고, 여기는 중환자실이니까.


그 삼십 분은 점심시간, 식판의 음식을 떠먹여 드릴 수 있다. 보호자들이 아닌 경우 간호사들이 환자들을 도왔을 것이다. 그에게는 식사가 없다. 가운을 입은 사람이 와서 말한다. 설사를 계속하셔서 금식 중입니다. 그는 누워 있고 눈을 감고 입을 벌린 채 있다. 작은 몸에 서둘러 이불을 덮는다. 그는 춥다고 하고, 아프다고 하고, 누구냐고 한다. 물 한 모금 먹지 못하는 입 속은 자갈밭이다.


그에게 적신 거즈를 구해 물려드린다. 그는 그것을 빨아들이고, 약간의 물기가 그에게 스며든다. 그의 몸을 닦는다. 준비한 수건에 더운물을 적셔서 닦는데 아프다, 아프다고 한다. 아무것도 안 하는데 아프다고 한다. 의사를 부른다. 의사 같은 사람이 와서 그에게 묻는다. 할아버지, 어디가 아파, 말을 해요. 의사는 고래고래 소리친다. 할아버지, 똥을 많이 쌌잖아. 아주 많이 매일 쌌잖아. 그래서 뭘 드시면 안 돼. 어디가 아파? 안 아프지! 소리친다.


그는 며칠 끼니마다 죽 한두 스푼이 전부인데 설사는 왜일까. 의사가 아무리 소리쳐도 그는 잘 듣지 못한다. 그렇게 눈앞에 얼굴을 들이밀어도 잘 볼 수가 없다. 의사는 잔뜩 화가 나서 소리친다. 모든 것이 환자의 잘못이라는 듯이 야단을 친다. 늙음이 병약함이 알 수 없는 증세들이 죄 같다. 늦어진 면회시간 십 분이 그(혹은 누군가의) 기저귀를 갈아드리는 데 쓰였겠구나. 그 일이 지긋지긋한 일이었겠구나. 그래서 짜증이 났구나.


의사에게 화를 내면 더 함부로 다루겠지. 더 뭐라 하고 더 거칠게 다루겠지. 아픈 몸을 더 아프게 하겠지. 힘든 데 까다로운 보호자라고 하겠지. 나는 아무 말도 하지 않는다. 허리를 더 깊이 숙이고, 수고하신다고 고맙다고 말한다. 고생이 많으시다고 몇 번이나 말한다. 이런 일이 처음도 아니다.


남의 병 이야기를 들을 때마다 나는 도망치고 싶다. 듣고 싶지 않다. 그 이야기들은 얼마나 비슷한지, 또 다른지. 그날 그를 두고 나오는 길, 무엇이 최선인가 모르지만 이것이 최선은 아니라는 것을 알지만. 아픈 사람을 우리는 얼마나 돌볼 수 있을까. 우리는 우리의 사랑하는 사람을 어디까지 언제까지 잘 돌볼 수 있을까. 돈과 시간이 많으면 할 수 있을까. 마음이 갸륵하면 할 수 있을까. 우리는 사랑하는 사람을 버린다. 병원에, 요양병원에, 요양원에, 무덤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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