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년의 관이 만들어졌을 때, 생시처럼 그 얼굴을 쓰다듬으며 울먹였을 가족들을 상상해 본다. 저런 관을 만들려면 시간이 필요했을 텐데 더운 나라에서 소년의 시신을 어떻게 보관했을까. 소년의 얼굴이 상하여 사라졌다면 석공은 어떻게 그 얼굴을 조각할 수 있었을까.
죽음 직후에 소년을 크로키했을까. 소년의 형상을 만들어가면서 몇 번이고 가족들에게 확인받았을까. 이 얼굴이 맞습니까, 이 표정이 맞습니까, 어색한 곳은 없습니까, 더 고치고 싶은 부분은요, 물었을까. 소년의 가족들이 이제 되었다고 할 때까지 몇 번이고 반복작업을 이어나갔을까.
고대 그리스 로마 사람들은 인간은 죽음을 지나 다른 존재가 된다고 생각했다. 당시 문헌에서 죽음은 ‘변화, 여행, 잠, 이별’ 등의 단어로 표현되었다. 무덤에 남겨진 조각에서도 ‘문을 통해 저승으로 이동’하는 모티프를 찾아볼 수 있다. 또한 저승을 ‘그림자의 제국’이라고 표현했는데 저승에서 죽은 사람의 영혼은 생명이 빠진 그림자로 지낸다고 믿었다.
오디세우스는 저승에서 만난 영웅 아킬레우스가 "저승의 모든 영혼을 다스리는 자가 되느니 이승에서 가난한 노예로 사는 편이 낫다"라고 탄식했다는데 우리에게는 ‘개똥밭에서 굴러도 이승이 낫다’는 표현이 있다. 사는 게 아무리 힘들어도 죽는 것보다 사는 게 낫다는 이 판단은 산 자들의 기대 혹은 오해일 수 있다.
저승에서는 이승에서 모든 사람을 다스리는 자가 되느니 저승에서 가난한 노예로 사는 편이 낫다는 탄식이 있을 수 있다. 개똥그림자밭에서 굴러도 저승이 낫다는 표현도 있을 수 있다. 살아보지 않고서는 알 수 없었을 커다란 기쁨과 슬픔이 있다면 죽어보지 않고는 절대 모를 구체적인 감정이 있을 텐데, 죽음을 지나 무엇인가 된다면 죽음이야말로 삶의 더블인 셈이다. 삶을 모두 기억한 채 죽음을 시작할 테니 삶 보다 훨씬 잘 죽음을 살아낼(?) 수 있을 것 같다. 만일 산 자와 죽은 자가 대결한다면 죽은 자가 유리한 입장일 것 같다.
그리스 로마 사람들은 산 자가 기억해 준다면 망자는 영원히 산다고 믿었다. 망자를 잊지 않고 기억하기 위해 도로에서 가깝고 눈에 잘 띄는 무덤 자리를 선호했고, 무덤이 도로를 향하도록 배치했다. 사람들의 시선을 끌기 위해 무덤을 호화롭게 꾸미고 봉분을 올리고 관리했다.
베트남에서도 보았다. 처음엔 형형색색 아름다운 마을이라고 생각했다. 멀리 있어 작게 보인다고 여겼는데 가까이 가서 보아도 작았다. 미니어처 같고 인형의 집 같은 마을이었다. 그곳의 망자들은 죽어서야 꿈꾸던 집 한 채를 갖게 되는가 보다.
* "소년의관” Sarcophagus with Bust of a Boy/ 대리석 석관 파편 로마, 2~3세기 빈미술사박물관 소장/ (국립중앙박물관 “그리스가 로마에게 로마가 그리스에게” 2023. 06. 15~ 2027. 05. 30 고대그리스로마실) 전시 참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