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석원의 <슬픔의 모양>에는 다음의 대목이 나온다. "우리에게 처음으로 하신 말씀은 끈으로 단단히 묶인 팔을 겨우 쳐들며 이걸 좀 풀어달라는 거였다. 아버지는 영화 <양들의 침묵>에 나오는 닥터 한니발 렉터처럼 두 팔을 묶인 것으로도 모자라 손에는 손 싸개 같은 것까지 씌워져서 그야말로 팔과 손으로는 아무것도 할 수 없도록 결박당한 채로 계셨다... 환자가 자기 손으로 콧줄을 잡아 빼시지 못하게. 그리고 저희들에게 힘을 쓰시지 못하도록 묶어둔 거거든요... 안 그러면 저희를 막 발로 차시기도 해서.." 읽으며 아버지의 손이 떠올랐다. 콧줄을 자꾸 빼시니 어쩔 수 없다는 병원의 설명. 화가 나셔서 펀치를 날리는 시늉을 하셨다는 오빠의 말도 있었다. 내 앞에서는 그냥 힘없이 계실 뿐이었는데.
그날 나의 마음을 저 작가는 고스란히 대신해 준다.
"우리가 살아가는 이 삶이란 것에 시간이 아무리 흐르고 상황이 아무리 달라져도 결코 변하거나 번복할 수 없이 중요한 게 있었는데, 그것은 바로 인간은 단지 목숨이 붙어 있다고 해서 살아 있다고 말할 수는 없다는 것. 오직 사람답게 살 수 있을 때라야 저 이가 사람이고 지금 내 앞에 이렇게 숨 쉬며 살아 있다고 말할 수 있다는 것, 바로 그것이었다. 아아, 그럼 어쩌지. 그런 관점에서라면 지금 나의 아버지는 전혀 그렇지가 못한데, 결코 살아 있다고 보기는 어려운 상태로 살아 계신데 어쩌면 좋을까. 세상 어딘가엔 어쨌든 숨이 붙어 있는 한 생명이며 그것은 고귀한 것이어서 인간의 힘으로 함부로 끊어서는 안 된다고 믿는 이들이 있을지도 모르지만, 내겐 삶이 동반되지 않는 생명은 생명으로 여겨지지가 않는데 지금의 이 상황을, 이런 아버지를, 도무지 어찌 생각하고 받아들여야 한단 말인가. … 생명은 어쨌든이 아니라 반드시 혹은 오로지라는 부사가 더 어울리는 개념이라고 생각한다. 숨이 붙어 있으니 어쨌든 생명인 게 아니라 오로지 삶이 동반되었을 때라야 생명일 수 있는 생명."
나만의 일이 아니구나. 우리 집만의 일이 아니구나. 거리를 걷다 보면 끝없이 이어지는 요양병원, 요양원들. 어느 산골을 지나가다가도 만날 수 있는 외딴 성채 같은 요양원까지. 그 건물들마다 층층이 침대가 있고 거기 누운 사람들. 의식이 있거나 없거나 손이 묶이거나 아니거나 답답하고 미칠 듯한 하루하루를 버티는 사람들 생각을 했다. 내가 몹시도 사랑하는 사람들의 모습과 나의 모습까지 오버랩되어 보이는 듯해서 거칠게 고개를 저어 본다.
어제 두 사람의 부고를 들었다. 친한 친구의 가족들이었다. 늦어버린 소식이었다. 지난달 말에 그리고 요번 달 초에 연락도 안 돌리고 장례식을 치렀다는 얘기였다. 그것도 당사자가 아니라 건너 건너로 들었다. 왜 연락을 안 했을까. 내가 부고를 전하다 말았던 것과 같은 상황일까. 조의금을 보내고 문자로 위로를 보냈다. 줄줄이 사탕처럼 밀려오는 죽음들의 주변에는 또 얼마나 많은 이야기들이 있을까.
출근길, 오른발 왼발을 움직인다. 종아리 허리 등뼈 목과 두 팔 끝의 두 손이 허공을 휘젓는 것 같다. 비 오고 춥다, 오월인데.